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대장이십니다. 아무리 그 길이 험한 길일 지라도 예수님은 앞장서서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너무 잘 아셨음에도 ‘군인들을 인솔하여 가시는 대장’처럼 무리들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앞서서 가신 예수님을 봅니다.
저는 예수님의 앞서서 가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참된 리더의 모습을 몇 가지로 발견해보았습니다. (1) 참된 리더는 눈앞에 죽음이 기다린다 할 지라도 능동적으로 앞장설 수 있었습니다. (2) 참된 리더는 위로부터 주신 사명을 결코 죽음이 기다린다할 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3) 참된 리더는 자신이 가는 길의 험난한 결과를 알면서도 전략적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4) 참된 리더는 뒤따르는 자들이 배신하고 떠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훌륭한 리더들이 많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다윗, 솔로몬,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정말 한 평생을 위대한 리더로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실체가 되셨고 그들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리더들이 자기 백성을 선한길로 인도하였지만 잠시 잠깐의 안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처럼 우리의 인생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한 리더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영광’과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한 리더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해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한주간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째날이 바로 종려주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하여 말씀대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야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구원의 길이었고, 영생의 길이었고,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삶을 시작하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고난의 한주간에 동참하하셔서 새힘을 받는 시간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라며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2. 예수님이 찾으시는 나귀 새끼(29-36)
눅19:29-36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어느 지점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지점에 이르렀고 그 곳에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어 오려고 했더니, 그 주인들이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하기로, 예수님이 일러주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고 말했더니 그들이 순순히 풀어주었습니다. 미리준비한것도 아니요. 봐둔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말씀으로 하셨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세상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실 뿐 아니라, 물고기 뱃속에 동전이 들어있는 것도 아셨고, 가룟유다가 배신하고 자살할 것도 아셨고, 베드로가 자신을 3번 부인할때 닭이 울게 될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아셨고, 죽음의 고통을 하셨고, 다시 부활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이신 사건들을 접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억지해석을 하며 미리 준비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자신이 인간으로 오신 메시야/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 새끼 나귀가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사건속으로 불려온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 자리로 불려진 사건이야 말로, 새끼 나귀의 부름받음보다 더욱 귀한 사건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잠시 본문에서 인용된 스가랴9:9,10절을 들어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슥9: 9,10 새번역성경)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너의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꺽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 새끼 나귀가 태우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실 분이셨습니다. 1) 공의로우신 왕, 2)구원을 베푸시는 왕, 3) 온순하신 왕, 4) 이방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실 왕 & 5) 이 바다에서 저 바다끝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끝까지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왕으로 오실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끼 나귀가 등에 태우실분은 바로 이런 왕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마음마다 왕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ㅡ“왕이신 하나님 높임을 받으소서 찬양하리라 영원히높임을 받으실 그이름 찬양하리라 그리스도 진리로 다스리네 기뻐하라 온땅이여 찬양하라 거룩하신 그이름 높이리라.”
3. 찬송하는 자리(37-40)
눅19:37-40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감람산을 넘어 내리막길 곁에/성전이 내다보이는 비탈길곁에)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두가지로 나눠집니다. 기뻐 찬송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찬송을 끊어버리라고 하는 부류였습니다.
첫째) 찬송하는 부류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바라보면서 너무 기뻐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다른 복음서와 함께 해석해보면, 그때 그곳에서는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이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큰 소리로 찬양하며 그 장엄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알 수 없는 하늘의 평화와 영광안에 거하여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찬송을 다시 부르기 위하여 기타를 찾았습니다. 시편59편16절을 읽고 다시 노래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기때문입니다. 기타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한개의 기타를 찾았는데 기타줄이 모두 녹스러 있었습니다. 손에 녹이 묻어나서 도저히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다른 한개의 기타는 줄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 기타는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타를 치지 않은지가 오래되었기에 목소리와 음정도 불안해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녹슨 기타줄을 걸레와 기름으로 어느 정도 닦아내고 다시 줄을 맞춰 녹음했습니다. <<하나님은 기타같이 살았던 저의 영적 모습을 보게 했습니다. 다시 닦아주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이때까지 저가 찬송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송을 가까이하게하여 주셔서 나의 잃어버린 찬송을 되살려 주셔서 하늘의 평화와 영광속에 살게 하여주옵소서!”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둘째) 책망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였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이렇게 당신을 따르며 큰 소리를 내며 당신을 따르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시위하는 자들처럼 보여, 로마군인들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받드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니 당장 노래를 멈추고, 흩어지게 하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바라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과 대치되기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병든자를 부정하다고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그들은 율법만 중시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대로 한영혼을 중시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런 예수님이 싫었고, 미웠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을 한다고 하면서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직접 죽이지 못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메시야로 따르고 믿고 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찬송소리도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찬송하는 자리에 머무는 자는 찬양이 기적을 만들어 줍니다. 예레미야17: 14절에보면, 여호와여 주는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불러줄 때 사울의 악귀는 그 마음의 생각에서 떠나갔습니다. 찬송을 멀리할 때 사울왕의 삶은 온통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얽룩져 다윗을 죽이려는데 안달되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었을 때 찬양이 끊어지기 시작하였고, 그가 음란죄에 빠졌을 때 그는 찬송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많이 찬송했을때가 두려울때, 도망다닐때, 외로울때 찬송을 가장 많이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의 행진을 하는 이때에 예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지켜 찬송하는 자리에 머물며 고난주간을 보내신다면 이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기적과 치유와 변화의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만약 우리의 입술로 찬양하기를 거부한다면 예수님은 땅의 돌들을 들어 소리지르게 할 것입니다.
찬송은 성도의 마땅한 본문입니다. 찬송은 기적을 만듭니다. 찬송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미움을 떨쳐버리고, 세상의 분주함에서 벗어나셔서, 오직 하나님의 소리에 집중하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갑절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미국, 어떤 시골 마을에 목수 아버지와 아들이 나무를 베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많은 나무를 전기톱으로 썰며 수많은 톱밥이 쌓였습니다. 그러더니 손목에 찼던 시계가 없어졌습니다. 나무를 자르면서 시계가 풀려 톱밥속으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을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기톱의 전원을 끄고 잠시 눈을 감고 톱밥속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조용한 적막을 흐르며 그 적막을 깨고 들려오는 작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따라 뒤졌더니 잃어버린 시계를 찾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보내셨는지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의 존재는 잃어버린 시계처럼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알 수 없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기뻐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고,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거부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한주간을 주께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려 기도하는 한주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하여 이땅에 보냄을 받아 십자가의 험난한 길을 가야하셨던 예수님, 감사드립니다. 영원히 죽어 지옥형벌을 면치못하던 저희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으셨야만 하셨던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저희들도 이 한주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영생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선한길로 구원의길로 이끌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로 향하사 죽으시고 영생주신 우리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