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타이민족의 기원
중국 기원설, 인도네시아 기원설, 토착민족 기원설 등이 있으나 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국 서남부 운남지역에 거주하던 타이족(Thai)이 중국계 Nanchao국(남조국, 7세기경 건립)의 지배와 영향을 받으며 수세기에 걸쳐 남쪽으로 이동, 현재의 태국 북부 및 라오스 북부, 미얀마 동북부에 걸쳐 부분적으로 소국가를 형성(Yonok, Shans 등)하였다는 중국 기원설 이 유력하다.
타이족의 독립 소국가 형성
13세기 몽골 침입으로 Nancha 국(남조국)이 멸망하면서 타이족이 현재의 태국 지역으로 대거 이동함에 따라 타이족의 독립 소국가들이 등장하였다.
Sukhothai 시대(1238 - 1378)
13세기에 출현한 수코타이는 여러 타이 소국가중 가장 번성하였고 태국 사상 처음으로 독립된 타이왕조의 기틀을 형성하였다. 수코타이는 행복의 시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Ayutthaya 시대(1350-1767)
1350년 Mon 왕국 지배하의 타이계 Uthong국 왕자(Rama Thibodi, 1350 - 1369)가 전염병을 피해 Chao Phraya 강 하류 Lopburi 지역에 정착하여 아유타야 왕국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1765년 왕조의 내부 혼란을 틈타 버마군이 침공하여 아유타야 왕조를 1767년에 멸망시켰다.
Thon Buri 시대(1767 - 82)
지방장관이었던 Phraya Taksin 장군은 Chao Phraya강 하구 서안 ThonBuri 에 도읍하고 버마군에 대항하여 1768년 말까지 Ayutthaya 의 과거영토를 회복하였다. 1776년까지 Taksin 장군은 타이왕국을 재통일하고 기반을 닦았으나 말년에 정신착란증을 보여 부하들의 반란으로 처형되고 Taksin 의 부하 장수인 Chakri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Chakri 시대(1782 - 현재)
Rama 1세(Chakri, 1782 - 1809) 타이족의 아버지와 중국계의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Chakri는 방콕에 도읍을 정하고 관제 및 지방조직을 정비하였고 또 캄보디아의 Battambang 지역을 병합하고 1785년에 버마를 격퇴하였다.
Rama 9세(Bhumiboi Adulyadej, 1946 - 현재)
형인 라마 8세의 의문의 죽음으로 19세에 즉위, 즉위 후에도 스위스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도 한 라마 9세는 1950년 5월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1967년 이래 백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외국방문을 하지 않고 있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농촌 복지사업과 후생복지 향상에 전념하고 있는데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올해 향년 80세.
국 명 : 타이랜드 왕국
- 태국어 : 쁘라텟 타이(자유의 나라)
- 영 어 : The Kingdom of Thailand
인 구 : 6,500만명(2006년도)
- 인종구성 :타이75%, 중국계 14%, 소수민족 11%
면 적 : 1554억 8,500만평(한반도 2.5배, 남한5배 크기)
- 접경국가 :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중국
- 국경길이 : 3,205km
- 해 안 선 : 2,615km
위 치 : 북위 5도 37 - 20도 27, 동경 97도22 - 105도 37에 위치
기 후 : 고온 다습한 아열대성 기후
- 연평균 기후 : 28도 (최고 40도 최저 27도)
- 연간 강후량 : 1,550mm
- 년평균 습도 : 79%(최고 94%, 최저 60%)
종 교 : 불교(94.6%, 소승불교) 무슬림(4.6%) 기독교(0.6%)
공식언어 : 태국어
행정구역 : 1개 특별시(방콕) / 75개주(Changwat)
1개 직할시(파타야) / 749개 군(Ampor) / 7,222개 면(Tambon)
- 지방의회 및 지방행정 관리는 임기4년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한다. 주지사, 여타시장들은 내무장관이 임명. 지방의회 의원은 모두 직선제임.
태국 최초 선교사
1828년: 개신교 선교사 후레드릭 구츠랍프(독일인. 의사)와, 톱 링(영국인)이 화란선교협회의 파송으로 태국선교시작, 개신교 선교의 효시.
종교 관습법 제정
1878년: 종교관습법이 선포되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됨
선교 역사
라마 3세왕때 외무부로부터 방콕에 머물면서 중국인들 가운데서 사역할 허가를 받았다. 또 그들은 사복음서와 로마서를 태국어로 번역하였으며 1831년에 중국계 태국인 '분띠'씨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31년에는 American Bora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소속의 David Abeel 목사가 입국하여 전도지와 약을 나누어주며 선교를 하였고, 최초로 책을 만들어 문서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찬양 3 곡을 가르쳐 '끼앙 꾸워이 씨안'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40년에는 '째쓰 다쓰웰씽' 목사와 '덴빗 브랏레이' 목사 겸 의사가 입국하여 선교를 하며 '덴빗 브랏레이' 박사는 태국 최초의 병원을 개원하여 많은 태국 사람들에게 치료를 해 주며 수술을 하였다.
개신교의 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목사이며 의사이며 뛰어난 행정가인 '덴빗 브랏레이' 박사에 의해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덴빗 브랏레이' 박사는 Monkut왕에게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의술을 통하여 친분을 갖고 선교를 준비하였다. 그는 후임왕인 Chulaiongkorn의 영어 교사가 되어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 '덴빗 브랏레이' 박사는 그의 아내와 미국 선교 협의회(American Missionary Association) 밑에서 1873년 죽을 때까지 43년 동안 한 번의 휴가도 없이 사역하였다.
이 기간에 사역한 선교 단체로는 영국 런던 선교협의회(LMS)와 미국 외국인 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for Commissions for Foreign Mission)가 1831년에 미국 침례교회 협회(American Baptist Convention)가 1831년에, 그리고 1840년 미국 장로교 선교부(The Presbyterian Church)의 선교사들이다.
1833년에 미국 침례교회 선교회 소속 '존 테일러 존스'선교사가 입국하였고, 1835년에는 '윌리엄 딘'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존스'는 1843년에 신약성경을 태국어로 번역 완료하였고, '윌리엄'은 1837년 11명의 성도와 함께 태국 최초의 교회(중국계 태국인)를 세워 '마이뜨릿짓 교회'라고 명명하였다. 그 이후 1882년까지 중국계 태국인을 중심으로 6개의 교회와 500여명의 성도로 성장케 하였다.
미국 장로교회의 최초의 선교사는 William Buell 부부로써, 1840년에 도착하였다. 장로교인들은 Buell의 도착 이후 19년 만에 태국인 가운데 첫 번째 결실을 보았다. 1859년 첫 번째 태국인 Choen 씨가 6명의 선교사가 30년 동안 사역에 힘쓴 결과로 세례를 받았다.
1847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소속 '스데반 매튠'선교사와 '사무엘 하우스' 선교사가 입국하였다. 1859년까지 이들의 활동으로 최초의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다. 1856년 최초의 태국인 교회인 방콕 제1교회(쌈레교회)를 세웠으며, 제2교회는 1878년에, 제3교회는 1896년에 세워졌다. 제4교회인 '씁판타웡교회'는 1904년에 최초 태국인의 힘으로 세워지게 되었으며 제5교회인 '와타나 교회'는 1922년에, 제6교회인 '싸턴교회'는 1932년에 제2교회에서 갈라져서 세워졌다.
태국 선교에 있어서 1852년부터 1883년까지는 선교의 성장이 느린 투쟁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두 명의 순교자를 낳게 되었는데 이들은 최초의 세례자 이후 1869년 지방 통치자인 '챠오 카윌라루트'(Chao Kawilaroot)의 은밀한 명령 하에 몽둥이로 맞고 창에 찔려 죽고 나머지 신자들은 피신하였다.
교회의 성장
1884년부터 1914년까지는 힘찬 교회성장 운동의 기간으로 1884년 10월을 기점으로 하여 태국의 북부지역에서부터 신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867년 Mcgilvary 선교사가 태국 북부지방인 Chiangmai에 도착하여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통해 북부 지방이 크게 복음화 되었고 이 기간에 여러 선교부가 교회를 설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그 결과 교회들이 많이 성장하였다.
1884년까지 152명이던 신자의 수가 1894년에는 11교회로 1,841명이 되었고, 1902년에는 2,929명으로 성장하였고, 1914년에는 26교회로 6,934명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남쪽 지역은 이에 비해 성장의 모습이 보다 느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일본이 태국을 점령하여 서방세력에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교회의 성도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었고, 또 20세기 초 선교에 공헌했던 인물들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남으로 태국 선교의 중심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교회는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초 6,000명이던 신자가 1960년에는 24,539명 , 1978년에는 58,953명으로 매년 9%씩 성장하였다. 그 성장 원인으로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활약과 신자들의 각성운동, 그리고 뛰어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시타산' 목사와 '풍스노이' 목사 그리고 '통캉' 목사 등의 활약이 컸으며, 외국 선교 단체들이 대대적으로 입국 활동하였으며 또 선교단체의 초교파적인 연합 활동이 부흥의 원인이었다.
요약
Alex G. Smith 는 태국의 개신교 성장 역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개척의 시대 : 1833년 - 1851년
2. 구축의 시대 : 1852년 - 1883년
3. 대 성장의 시대 : 1884년 - 1914년
4. 성장의 정지 시대 : 1914년 - 1940년
5. 핍박과 배교의 시대 : 1941년 - 1945년
6. 전후 성장의 시대 : 1946년 - 1982년
7. 미래 전망의 시대 : 1982년 - 2000년
현재 태국 인구 6,300만 인구 중 개신교 성도는 약 40만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으며(0.7%) 사역하는 전체 선교사수 약 1,500명 이상이며, 한국 선교사수는 300 가정을 넘어서고 있다. 180년 이상의 선교 역사를 가졌지만 선교결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선교하기 어려운 나라중의 하나이며 한국은 2006년을 맞이하며 태국 선교 50주년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