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 바벨 탑의 의미: 혼잡과 흩어짐에서 소통과 선교로
본문
창11장1-9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3-07-23

 

 

창11장 1-9 [극복] 바벨 탑의 의미: 혼잡과 흩어짐에서 소통과 선교로

The Meaning of the Tower of Babel: From Confusion and Dispersion to Communication and Mission
하나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가정안에서 가족들이 하나가 되고, 교회안에서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군대의 군사들이 하나되고, 몸의 지체들이 머리를 중심으로 하나될 때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빠진 하나됨은 위험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바벨탑 사건은 바로 하나님이 빠진 하나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빼놓고 도시를 건설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다 못한 하나님은 내려오셨고 그들의 건설을 중단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탑 공사는 중단되어도, 하나님의 나라 공사는 계속된다는 내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Ⅰ. 흩어짐을 면하자는 사람들 (1-4) 
개역개정)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했고, 새번역)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언어”라는 것은 ㄱ.ㄴ.ㄷ.ㄹ…이라는 기호들이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언어’라고 하고, “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호 체계로 된 언어를 사용하여서 정보를 전달함으로 소통하는 행위를 ‘말’이라고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노아의 자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노아 홍수심판으로 다 죽고 노아 가족만 살아 남았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자손들은 한 가족안에서 하나의 언어와 말을 가지고 있었고, 노아홍수 이전에 이미 그들은 하나의 언어를 통용하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말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소통이 된다는 것이고, 소통이 될 때 어떤 일이라도 행할 수 있는 것이고, 마음이 하나되어 그 일을 추진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척’하면 척알아듣고, ‘딱’하면 딱알아들었습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성령안에서 하나됨을 지켜가야 합니다. 
본문 2절에보면,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했습니다.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라는 말은 단순히 동쪽으로 갔다는 공간적인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야할 노아의 자손들이 심판에서부터 구원받고 큰 은혜를 입은 민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시날 평지”였습니다. 시날 평지의 “시날”이란 말은 “두 강사이의 땅”이란 말입니다. 그 두 강줄기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있었고, 그 두 강 사이의 평지는 비옥한 땅이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안식처로 삼고자 도시를 건설하기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벽돌을 구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반 태양광으로 말리는 것보다 불로 구워만든것이 더 단단한 벽돌을 만들 수 있었기에 한 마음이 되어 열심이 벽돌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접착제 역할을 하며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4절 말씀에 보면, “또 말하되, 성과 대(도시와 탑)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흩어지지 않으려고 도시와 탑을 건설했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하늘까지 탑을 쌓으려했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곧 종족 보존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가 흩어지지 말자는 주의였습니다. 이곳에서 영원토록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만한 곳은 둘도 없으니 이곳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랬습니다.
민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되려는 곳에는 위험성이 따릅니다. 하나되려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윤리적 위험성입니다. 또, 하나되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기 때문에 종교적 위험성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창1:2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되어 땅에 충만하기는커녕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생육, 번성, 충만, 정복”하기를 거부합니다. 도리어 “안주, 정착, 진보가 없이 주저 앉으려고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세계 열방으로 흩어져 땅을 정복하고 번성하고 충망하라고 하셨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Ⅱ. 흩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5-9)
창11: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4절 이전까지는 인간들이 행하는 일들을 중점으로 기록되었다면, 5절부터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 속으로 강림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창조자, 전능자, 아버지, 심판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단순히 도시와 탑 쌓는 것을 구경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 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오실 때 인생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본문 5절에서 “인생들/’뻬네 하아담’”이란 표현은 “아담의 아들들”이란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이란 말이 더 접합할텐데 굳이 아담의 아들들이란 단어를 “인생들”이란 표현속에 감추어 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담이후 모든 인류가 죄인이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아담이후로 죄인들입니다. “죄인”이란 하나님의 뜻에 모자라거나, 빗나갈 때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인생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행동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일심으로 연합하여 하는 일들이라고는 자신들의 뜻대로만 살아가면서, 자기들의 뜻만을 실현시키고자하는 빗나간 인생들의 건설현장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들이 비단 노아의 후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네 인생들도 하나님의 뜻에 빗나 살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하는 행동이 옳다고 여기는 인생들이 그런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며 달려들던 종교지도자들의 빗나간 종교생활이 마치 자신들의 행위가 옳다고 여기며 소리지르는 것과 일반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행하는 일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속으로 강림하셔야 하셨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하나님은 왜 미연에 방지차원에서 저지하실 수 없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연에 이런 비참한 상황으로 나아가기 전에 미리 막아 주실 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선하시다면, 하나님은 앞일도 다 아신다면서, 얼마든지 좋은 방법으로 미연에 방지해 주셔서, 인생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은 면하실 수도 있게 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의지가 악용될때 마다 그 결과가 비참하게 끝나는 것을 성경에서도 보았고,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 수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셨고, 참아 인내하시며 기다려주시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시며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또 죄악을 일삼고 하나님과 멀어져 빗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굴곡같은 인생이 역사속에 흐르지만 성도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났고, 저 천국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빗나간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소통을 막아버리셨습니다. 소통이 막히는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없어, 혼잡하고, 흩어지기 시작하더니 도시와 탑의 건설 현장이 마비가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갈 때 소통을 막으십니다. 소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좋은 것이지만 악용될 때 그 결과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없다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창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인간의 삶은 지금도 여전히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세대간의 소통, 부부간의 소통,  교회안에서의 소통, 직장안에서의 소통, 민족간의 소통속에서 우리는 같은 말을 쓰는데도 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혼잡과 분리 그리고 흩어지는 경험들을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현대판 시날 평지의 바벨의 모습입니다. 

Ⅲ. 바벨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소통방법과 선교방법 (행2:1-13)
인생들이 흩어지지 않으려고 도시와 탑을 쌓고, 하늘 꼭대기까지 탑을 쌓아도 하나님이 보실때에는 하나님께 해한 도전이며 대적 행위였습니다. 
다니엘서 4장10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하늘에 닿았던 큰 나무를 보았는데 그 큰 나무는 그 자신을 의미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교만한 왕은 짐승처럼 낮아졌지만, 7때가 지난 후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회복시키셨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는 것을…
오직 우리를 하늘에 닿을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시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만이 천국가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의 지신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었음을 믿고 의지할때 우리는 하늘과 소통이 가능합니다.
오늘 내 인생의 시날 평지는 어디입니까? 그곳에서 바벨 탑을 세워가고 있다면 하나님은 개입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끝가지 선교하는 일입니다.
행1:8절,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어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땅끝으로 가라는 명령이 교회의 본질이며 사명이고 본업입니다. 이것이 언제 회복되었습니까? 행2:1-13 오순절날 회복되었습니다.
행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발효되기전 감미로운 포도즙에 취) 하더라
하나님은 바벨탑 건설을 중단시키셨지만, 예수 안에서 다시 완성하셨습니다. 다시 소통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되게 하셨고, 다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바벨탑은 하늘에 닿을 수 없이 중단되었어도,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에까지 연결되었습니다. 

Ⅳ. 결론
인생들은 여전히 아담안에서 바벨탑의 혼잡과 흩어짐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소통과 선교는 천국을 이어주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멀리한 자들에게 소통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먼나라 가는 것도 선교이지만 가장 먼저 내 주변을 둘러보며 사회에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70세 80세가되면 새로운 나라로 입성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교인이 될 수 있다면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은 언제나 고통이 수반되고 있지만 저 하늘의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인생의 바벨을 극복하는 길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소통과 선교가 이루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 내가 믿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이 한주간, 이 한달의 삶속에서 교회가 극복해내야할 것들을 찾아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를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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