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헌금] 가인과 아벨의 헌금
본문
창세기4장 1-8; 히브리서11장 4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3-10-15

 

 

[복음적 헌금] 창세기4장 1-8; 히브리서11장 4 가인과 아벨의 헌금

Genesis 4: 1-8; Hebrews 11: 4 Cain and Abel's Offering

 

헌금에 대한 “설교”는 어느정도는 용납할 수 있을 것이지만, 헌금에 대한 “강요”는 누구라도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생활은 빠듯하지, 당장 공과금을 내야하고, 자녀교육비를 내야하고, 먹거리를 사야 하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제외하더라도 주머니를 뒤져보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생활비마저 빠듯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헌금 설교를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에서 헌금을 통하여 교훈하고 있기때문입니다. 2) 헌금의 본질을 깨달아야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 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헌금은 단순히 돈(물질)을 드리기 이전에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삶을 드려야 할지 배워야 하기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열납하실 삶의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속에는 오늘 본문 창세기4장의 가인과 아벨의 최초의 헌금(헌물)뿐 아니라, 창세기14장의 아브람이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드렸던 헌금(십일조)과 창세기28장의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헌금(십일조)을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과 또 말라기3장에 나오는 헌금(십일조)과 마가복음12장에 등장하는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을 칭찬하신 사건 그리고 그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 헌금관련한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헌금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헌금생활이 형식화되면 헌금이 마치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보다 돈의 도움을 기대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헌금은 드렸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얼마를 드렸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복받았다고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어야 할 인생이 돈으로 평가 받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1:11-15절에보면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 내가 싫어한다, 내가 곤비하였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하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우리에게 헌금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통하여 우리가 공경해야 할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섬기게 하셨고,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며, 세상의 왕이 하나님이시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이 세상속에서 헌금설교를 통하여 성도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게 하시려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1. 헌금은 정성입니다. (1-4 상반절)

저는 헌금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라는 의식보다는 예배와는 별도의 요소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여태껏 신앙생활하면서 주보에도 보면 헌금에 관련한 통계는 제일 뒷편에 실려 있었고, 마치 서커스 쇼를 다 보여주고 모자를 돌리며 관람료를 받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 헌금이었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뒷방 취급하며 무관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헌금도 예배의 요소이며 예배적 의미를 갖출 때 헌금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귀중한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순서에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찬양도 있고, 신앙고백도 있고, 묵상기도도 있고, 찬송도 있고, 말씀 경청도 있고, 축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라고 할 때, 머리도 몸이고, 팔도 몸이고, 다리도 몸에 속하듯이, 예배라고 할 때 찬양, 신앙고백, 기도, 말씀경청, 축도만 예배에 속한 요소가 아니라, 헌금도 동일하게 하나의 예배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지금 예배 형태보다 더 복잡하고 번거로웠습니다. 지금 처럼 심플한 예배 형체로 변모되었던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은혜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순서 하나 하나가 심플하다해서 대충 치르는 형식이 되지 않기위해서는 찬양할때도, 신앙고백할때도, 기도할때도, 말씀전할때도, 축도할때에도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을 드릴 때 진심, 전심, 성심을 다해야 고백하고 감사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헌금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1) 세상적인 복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헌금을 해서는 안 됩니다. 헌금하면 복을 준다는 목적으로 헌금하면, 만약 자기가 바라는 복을 못받으면 신앙도 헌금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2)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을 따라 헌금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물질이 있어도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탐욕에 눈이 멀어 있는 방식입니다. 이 땅에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을 짓밟고라도 더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 방식입니다. 헌금이 나의 이익과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금할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3) 헌금은 무당에게 복채를 주고 불행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적에 무당불러 우리 누나 고치겠다고 굿을 하면서 신령님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깐 돈을 더 내놓아야 한다고 하니깐 지폐를 건내던 어리석은 일을 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복채받고 불행을 막아주고, 문앞에서 기다리다가 돈을 더 내놓으면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가인과 아벨이 제사할 때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던 방식은 스스로 드렸던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담에게 전수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단을 쌓기위해 돌을 쌓고, 나무를 주워오고, 불을 피우고, 돌칼을 사용하여 짐승을 잡아 제단위에 올리는 모든 순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자신이 키웠던 양을 잡아 드리거나, 곡식을 드리는 일 또한 아담으로부터 배웠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안에서 어머니처럼 세심하게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헌금에 관련하여 한가지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헌금을 드릴 때 구겨진 지폐로 드리지말고 다리미로 다려서 드리라고 해서 다리미로 다려서 드렸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구겨졌다고 돈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는 자세를 배우게 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칫 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는 않을까 싶어 정성껏 다려서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원어에서는 양의 첫 새끼가 복수형태로 쓰였습니다. “그의 양 첫 새끼들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한 마리만 드린 것이 아니라 여러 마리와 그 기름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수고와 정성이 들어갔겠습니까! 아벨은 형보다는 구별하여 드렸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차와 방법대로 정성을 다해 드렸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건성으로 드렸던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여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때에도 단순히 헌금만 드렸다는 형식적인 헌금이 진정한 헌금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준비된 마음 곧, 정성을 헌금속에 함께 드리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헌금은 믿음입니다. (4절 하반절-8)

아벨의 봉헌은 그 봉헌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믿음,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믿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둘러 덮고 보호하신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가인의 봉헌은 그 봉헌속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있었을 지라도 형식적인 믿음 때문에 내면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했습니다. 

 

창세기 본문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거절 이유와 열납 이유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 분명하게 그 이유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께 봉헌하였는데 어떤 사람의 헌금은 받으시고, 또 어떤 사람의 헌금은 안받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며 거절당했다고 한다면 거절당한 사람은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습니까? 가인은 그렇게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4장6-8절입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의 평상시 죄된 생활과 삐뚫어진 인격 그리고 형식화된 신앙을 하나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아벨같았으면 즉시로 회개하고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몸부림치며 용서를 빌며 변화된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진실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쳐죽임으로 분풀이를 해버린 것입니다.

 

가인을 보면서 내 속에도 믿음이 떨어지면 이와 같은 짐승이 움크리다가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당기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롬7:23).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엎드려야 합니다. “주여,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사오니 성령님 나를 도우사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주시옵소서(롬8:2)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그리고 나면 언제라도 하나님은 내게 육신의 일을 끊어주시고 성령의 일을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가인의 모습이 성령안에서 변화되어 새사람을 입고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아벨의 정성과 믿음의 봉헌은 그가 죽었어도 우리 가슴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히11:4절을 봉독)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결론

헌금은 정성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가인은 형식적 믿음으로 땅의 소산을 드렸지만, 아벨은 정성과 믿음으로 양의 첫새끼들과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헌금이 되려면 복음적 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받은 십자가의 은혜가 묻어 있고, 구원의 믿음이 묻어있고, 새생명주신 감사가 묻어있는 헌금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졌습니다. 이런 기쁨과 고마움에 감사하여 드리는 저희들의 헌금이 복음적 흔적이 묻어있는 헌금되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물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모든 것을 주신 우리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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