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본문
눅17장11-19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3-11-05

 

 

눅17: 11-19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Luke17: 11-19 He threw himself at Jesus' feet and thanked him--and he was a Samaritan.

 

감사는 감사하는 이유를 찾을 때 더 좋은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이유가 없는데 감사하라고 하면 ‘강요된 감사’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진정한 감사를 알고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 시험이 찾아오고, 시련을 겪고 있는 자가 감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고역감사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이유를 찾아가는 여정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해도 그 자리에 이를 때 그 온전한 지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문둥병환자 10명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병원에서는 문둥병을 “나균(leprae)에 의한 감염증으로 나균이 피부, 말초 신경계, 상부 기도를 침범하여 조직을 변화시키는 만성 전염성 질환”이라고 했습니다.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1년에 1만명당 1명꼴로 걸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질환은 노르웨이 의사 한센((Gerhard Henrik Armauer Hansen, 1841년 ~ 1912년)에 의해 나균이 처음발견되었다고 “한센병”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병이라고 불렸는데 나병의 ‘나癩’ 는 “문둥이 나”라는 한문을 그대로 풀어 ‘문둥병’이라고 불러왔던 것입니다. 한센스 병에 걸리면 9개월~20년 잠복기간을 가지고 있다가 다양한 곳으로 침범하는데 혹은 피부와 코 점막과 눈과 그외에 어느 지점에 퍼져 감각이 없거나 혹은 과다 통증을 유발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문둥병에 걸렸다고 제사장에게 진단받으면 스스로를 부정하다고 외치고 마을 밖으로 나가 혼자 살아야 합니다 (레13:45-46).

 

전라남도 고흥에 작은 사슴처럼 생긴 소록도가 있습니다. 그곳에 갔었다가 두가지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첫째) 한센병환자 가족들은 그곳에 함께 살고 있어도 큰 길을 중간에 두고 멀리 떨어져서 봐야했던 그림이 생생합니다. 둘째) 감금실에 붙어 있는 글에 보면 “하도 괴로워서 이불 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 했지만, 내 주의 위로하시는 은혜로 참고 살아온 것을 주께 감사하나이다”라고 적힌 글귀가 생생합니다. 그런 비참한 삶의 현장속에서도 주의 위로와 은혜와 감사를 찾아가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문둥병자들(본문 중심적 단어사용)이 겪어야 하는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괴로움과 사회적 시선 그리고 종교적으로 부정하다 선고된 현실 앞에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며 격리되어 살아가야 하는 인생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이 질병에서 놓임을 얻는 것밖에 길이 없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문둥병과 같은 만성 고질적 악한 습성과  무감각증과 썩어가고 있는 신앙에서 벗어지고 놓여지고 치료받고 회복되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예수님과 문둥병자들과의 만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리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지나가시다가”기록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둥병자들의 입장에서는 찾아오신 예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갑작스런 행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실 섭리를 봐야 합니다). 그때 문둥병자 10명이 예수님을 만났고, 멀리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처지였어도, 예수님께 큰 소리로 긍휼을 요청하며 외쳤던 것입니다. 이들의 외침은 예수님이 누구실까의 단계가 아니라, 그들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 그분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믿는 단계까지 이르른 것이었습니다. 

 

만남이란 의도적 접근도 있지만, 갑작스런 상황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영혼들은 더만히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이 갑작스런 상황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나기로 이미 작정하고 만난 것도 아닙니다. 저와 아내가 의도적으로 만나려고 만난 것도 아닙니다. 살다보니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에 순종하니깐 이곳에서 여러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자기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라고 하셨던 것이다.) 저와 아내가 만난 것도 갑작스런 일이 하나님 안에서 작정된 일이 었습니다. 그때 저는 전도사였고 아내는 교사요 성도였는데 담임목사님이 우리를 금요예배후 밤12시에 한강공원에 내려놓고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우리의 시작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환경으로 밀어 붙여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안이뤄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귈 수 있는지 7일을 기도하자고 의논했고 아무 응답이 없는 것도 OK응답으로 알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어 사귀게 된 것입니다. 서울대 공원에 가서 손을 잡아야 겠다는 의도적인 마음이 들어 꽉 잡았습니다. 벤치에 앉혀 무릎위에 베개삼아 드러누워야겠다고 의도적으로 누웠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의도적 시도가 시작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 접근이 없었습니다. 지나가시다가 잠시 한 촌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문둥병자 10명이 소리쳐 “긍휼”을 요청할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이 하나님안에서 구원의 일을 이루실 일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세상에 오신 목적대로 이 상황을 구원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적용)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말씀과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함께 하십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의 주변을 지나가시기도 하시고, 내가 사는 “마음속 한 시골 변두리”를 지나가시기도 하십니다. 그럴때 자신의 문제를 믿음으로 예수님께 긍휼요청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의 일을 위하여 그 일을 만들어 가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2. 권위. 순종. 믿음

14절입니다.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여기며 나아가라고 시험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치유의 기미도 없는 그들에게 무턱대고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누가 가겠습니까?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한번쯤 생각해보고 현실을 둘러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10명중 1명도 의심없이 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3가지 중요한 단어가 본문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째) 권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질 없는 창조적 권위, 치유의 권위, 회복의 권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위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둘째) 순종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영적 질서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앞에 온전한 복종은 예수님께서 아버지하나님께 하신것처럼 피조물인 인간이 예수님의 세워진 권위앞에 어떻게 굴복하느냐의 태도입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본문에는 믿음이라는 말은 없지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없이는 예수님의 권위도 무시하고, 믿음없이는 순종도 무시하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권위앞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는 도구 방법은 여러가지입니다. 소경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여겨 실로암못에가서 씻으리라는 방법을 사용하셨고,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셨고,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만져도 낫게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방법은 그들의 긍휼요청에 바라보시며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리라”고 말씀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떤 방법이 꼭 맞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맞는 방법으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주의 능력이 방법에 있지않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있기때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간에 Larry Warner의 Journey with Jesus의 4주간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내게 위대하게 나타났는지 발견해가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를 하나 쓰게 되었습니다. 제목: “지금도 나는 그 사랑안에서 폭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의 병든 침상곁에 머물러 기도하시는 끊임없는 주님의 사랑, 다 주시고도 하나뿐인 아들까지 주신 아낌없는 사랑, 나같이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주님의 사랑은 사치스럽고, 낭비적이실텐데 그럼에도 흐르고 넘치게 주시는 그 사랑, 주의 사랑은 경이롭고, 무차별적이고, 무한하고, 무조건적으로 퍼부으십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고 지금도 그 사랑안에 폭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엡3:17-19)

 

3. 참된 믿음은 예수님께 고침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되고, 예수님께 감사로 이어질 때, 예수님이 찾으시고 - 인정하시고 – 구원하시는 길로 끝까지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10명 다 고침 받았거늘 아홉은 어디 있느냐?”(17). 참 믿음은 그 만큼 찾을래야 찾기가 힘듭니다. 이 땅의 것을 다 획득하고서도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이 한 사람 처럼 믿고 – 순종하고 – 고침받은 후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사례 곧 감사를 예수님께 하려고 감사하는 자리까지 나아오는 이 한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물으셨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18).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이방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의도적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도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하지 못하는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장로들, 대제사장들의 신앙을 이방인과 대조적으로 지적하기 위함이였습니다. 마치 9명을 유대인들과 형식적 종교인들로 비유하시며 그들은 형식적 신앙생활로 자기가 정한 사람이 된 것으로 만족하며 예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갈지라도, 오직 한 사람 이방인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하는 자리까지 다가가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적용) 내가 무시하는 그 사람이 나 보다 더 큰 은혜를 사모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본질적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작은 일, 좁은 길, 감사할 것들, 내가 그동안 보지 않았던 것을 보는 사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내가 형식적으로 만족한 종교생활한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멀어지고 있다면 구원과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이 형식적 신앙생활에서 마음의 신앙생활로 변화되어 예수님께로 다가가며 감사할 것들을 찾아가는 은혜가 있는 이번달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내게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한달을 어떤 어려움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지 말게하시고, 내가 받은 사랑이 많기에 예수님께 다가가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우리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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