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마 백성은 하나님을 들어야하는 백성입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쉐마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백성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5절을 보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듣고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여기 나왔습니다. “(자기)잘 오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상대)잘 오셨습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듣고 사랑함에 미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의 본성이 죄로 더럽혀져 태어나기 때문에 ‘무얼하던지 모자라고, 부족하고, 삐 뚫어’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를 볼 때 그가 늘 미숙해 보이고, 그가 나를 볼 때 나도 인간인지라 늘 미숙해 보이는 것입니다. 좀더 성숙해지려면 그 미숙함을 선한 마음으로 서로 채워주고 도와주면서 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들의 본성은 ab형인가봅니다. 다 내 모습 같고, 다 내 마음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과 저를 누구보다 하나님이 잘 아셨습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듣고 사랑하는 일에 너무 미숙하니깐, 그들의 입장에서 쉐마전통을 만들어 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더 좋은 쉐마전통을 만들어 하나님을 더욱 듣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선한일이 될 것입니다.
1.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 (6)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서 관제탑의 역할과 같습니다. 비행기의 관제탑에서 항로가 결정되면 비행기를 정하고 조종사를 정해서 비행기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조종사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태우고 가나안까지 가야 했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행진 거리가 400miles(640km)정도입니다. 차로 달리면 7-8시간이지만,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인과 장정들 약 250만명이 함께 걸어 가야 하니 대략 3개월이 걸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시내산에 이르러 1년가량(11개월5일) 율법교육을 받아야 했고, 시내산에서 가나안 진입로까지 11일이 걸려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광야과 가나안의 경계선에 있는 도시 [가데스 바네아]였고, 그곳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게 된 것입니다.
각 지파별로 한명씩 정탐꾼을 뽑아 총 12명을 급파하여 보냈고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안 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2명중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니라 우리가 올라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며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통곡을 하며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쳐 죽이려고 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오해하며 불평한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자, 여기로 가다가는 다 죽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40일 정탐한 시간을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을 기다리게 하시면서 1세대들을 죽이셨고, 2세대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와의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신본주의과 인본주의의 치열한 갈등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인본주의가 이기는 것 같아 보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으로 결말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늘날”이라는 말에서 이미 새로운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땅을 위한 “오늘날” 준비된 새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있으십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너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고하셨습니다. 다시는 잊어버리지말고, 불신하지말고, 대적하지말고, 오해하지말고, 순종하고, 따르고,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의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중심입니다. 인간중심에다가 새기라고 한 것입니다.
2.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어느 때든지 강론할 것이라! (7)
신6:7을 보십시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자녀들도 감동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물론 어려서 지금은 잘 모를 자녀들도 있지만 부모는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아이들 마음속에 생명으로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앉았을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때에든지, 일어날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붙잡아 놓고 강제나, 의무나, 규칙으로 가르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전달시키라는 말이 강론, 곧 자연스러운 대화속에서 친숙하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미국와서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얼마나 친숙한지 남의 눈치보지않고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다정하게 대화하는 것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문화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전혀 어릴적 땅에 앉아 부모님과 다정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들어 기억속에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땅바닥은 아니지만 평상에서 잔치국수를 해먹으며 오손도손 즐겁게 이야기하던 기억이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모내기하면서, 고추따면서 논바닥에 앉아서 맛있는 참을 먹던 기억이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내게도 기억조차 할 수 없었던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끄집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도 “입다물고 밥먹으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밥상머리 교육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감사한 것입니다!”
얼마전,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돈 있으면 돈없는 사람을 마음대로 괴롭혀도 되었습니다. 돈 있으면 학교폭력을 해도 교사와 경찰을 매수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돈이면 살인까지도 덮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돈으로 부모의 역할까지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작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과 사랑임에도 그들은 돈으로 부모의 역할을 대체시켜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마치 부모역할을 다 한 것처럼 우쭐대는 부모들의 모습을 자녀들은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언제 부모님의 고마움이 생각많이 납니까? 예일이가 타주에가서 공부해보니깐 조금 성숙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곁을 떠나 유학가면 부모가 해주던 따뜻한 사랑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자식이 군대 가면 엄마생각이 부쩍나는 것입니다. 자녀가 죄짓고 감옥가면 부모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5월달 칼럼/어떤 지방에 교도속에서 재소자 체육대회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부모님 등에 업고 달리기를 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1등하려고 빨리 달리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어머니를 등에 업는 순간 너무 눈물이 나와서 어머니가 자식 눈물을 닦아준다고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는데, 사실은 눈물을 흘리며 제대로 뛰지 못한 이유는 단 1분 1초라도 어머니를 업고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뛰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고마워 변화되겠다고 다짐하는데, 신앙인들에게는 더 위대한 변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모세의 어머니는 어릴적 모세에게 하나님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는 어릴적 사무엘에게 하나님을 들려주었습니다.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하나님을 들려주었습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나는 최고의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신학교를 졸업했느냐고 했더니 “내 어머니의 품속 신학교 가장 최고의 신학교였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들, 자녀들은 언젠가 여러분을 떠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 있을 때 하나님을 들려주십시오! 마음속에 새겨주십시오! 부지런히 가르치십시오! 아이들과 함께 먹고, 함께 동행하며, 자면서- 일어나면서 말씀을 대화하십시오. 말씀이 살아 생명이 되고 힘을 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영혼의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합니다. 김교수, 이교수, 강교수, 한교수, 송교수, 박교수… 여러분의 마지막 생명다하기까지 자녀들에게, 교회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전심으로 성심으로 가르치는 일에 부지런한 부모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8-9)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려면 이 정도의 열심은 있어야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청년은 중국어를 전공했는데 집에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집안 곳곳에다가 중요한 단어와 문장을 붙여 놓고 지나다니면서 그것을 외웠던 것을 보았습니다. 아하!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어떤 청년은 책에다가 낙서를 하면서 책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한데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도 안되니깐 찢어서 뜯어먹어버린 청년도 보았습니다. 결국 그 책을 뜯어 먹는다고해서 다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의 열심은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은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적’문화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몸에 치장을 하고, 우상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집에 모셔 놓는 것으로 누군가가 지켜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 살다 보니, 그런 문화에 익숙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문화속으로 들어오셨고 그들의 풍습과 방식과 생각의 틀(사고)속으로 들어와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할 때 집 문설주와 문인방에 피를 바르는 방식으로 죽음의 권세가 그 집을 넘어가게 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피공로를 의지하며 예수님을 믿으려고 해야 되는데 문기둥에 뭔가를 붙이고 바르는 것으로 내가 잘 믿는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는 문자 그대로의 방식만으로 말씀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백성들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들의 풍습속에서, 그들의 상황속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꼭 그렇게만 해야만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문화를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목에매고-미간에붙이고-문에새기는 것을 나의 마음과 성품과 힘, 나의 중심과 영혼과 최선, 진심과 전심과 성심을 다해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님’를 믿고 따르는 것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손목이라는 행실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미간이라는 사고방식을 되돌아보고자합니다. 집문설주와 바깥문이라고하는 사회성 관계성 영향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33장에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몸에 붙은 단장품 곧, 귀금속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그 귀금속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내게 했고, 귀금속에 새겨진 애굽문화의 우상의 잔재들이 새겨져 있다보니 그 귀금속이 그들의 신앙에 해가되면 해가되었지 덕이 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고, 바울은 고린도전서3, 6장에보면 예수 믿는 우리 몸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겉치레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주의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하여, 나의 행실과 사고방식과 사회성까지도, 하나님앞에 내려놓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의 행실과 사고와 사회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되게 하여주옵소서!”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한 가정의 어버이로 세워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살아왔던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녀들과 사회가 요구하는 빛과 소금의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 또한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안에서 변화되고, 변화되어가는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인생되고, 가장되고, 교인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