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에 등장하는 산은 산은 헬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헬몬산은 (2224m)의 높은 산이었고, 높은 지대의 눈은 잘 녹지 않아 사람들이 그곳을 ‘백발노인의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질 때면 조금씩 녹아내려 물이 사방으로 흘러내려 곡물이 잘되어 에덴동산같다고 했습니다. 헬몬산 밑에는 가이사랴 빌립보 동네가 형성되었는데 헤롯왕 빌립(분봉왕)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잘 보이려고, 그곳에 가이사를 위한 신전을 짓고 마을을 확장시켜 그 동네 이름을 로마황제 가이사라는 이름과 자기 본명 빌립이란 이름을 붙여 만들어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만든 동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헬몬산으로 오르기전 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말씀해주신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헬몬산으로 오르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실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구약을 보면) 모세는 80세에 부름받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만2개월)만에 도착한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해야할때마다 그 높은 곳(2271m)을 올랐는데, 그 연세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그곳을 (8)번이나 오르내렸다는 것을 보면, 나의 형편과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오르셨던 것은 의무가 아니라 신앙이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옛날 할머니 권사님들은 새벽기도하려고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 교회나와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일을 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의무라기보다는 믿음이었다는 것 밖에 다른 의미를 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그저 가야하니깐 갔었을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리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울려퍼져 자자손손 믿음의 유산이되어 자녀들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마을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는 숨통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명의 특별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였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사역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을 보여주시려고 그들을 사역의 속내까지 보여주신 특별한 제자들이었습니다. 1)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그들을 동행시키셨고, 2)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기도에서 더 깊은 산속으로 데려가 그들로 기도시키셨고, 3) 감람산에서 성전을 그들과 함께 바라보시며 “이 큰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고 말씀해 주시며 이루어질 징조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3명의 제자들과 함께 특별기도회로 오르셨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스런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1.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28,29).
헬몬산에서 기도가 한창일 때 예수님께서는 그 얼굴(용모)이 해같이 빛나고(마17:1), 그 옷이 빛같이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표현하기를 “빨래를 해도 이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다”고 했는데, 성경은 예수님의 옷이나 얼굴에만 집중시키려고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산하는 광채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삼위일체의 2위 성자의 광채).
*구약의 모세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려와서는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하지만, 모세의 얼굴에 묻은 광채는 예수님의 광채에 비하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모세의 얼굴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의 간접적 조명에 불과했다고 하다면, 예수님의 광채는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진리와 은혜의 직접 광채였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에 관하여 말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했습니다. 어쩌면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의 목격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천상에서는 아버지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이었고, 지상에서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넘치는 영광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영광에 관하여 말하기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익히 보고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현실의 고난속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있기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고, 다시 오실 때 주님과 다시 만날 그 영광스런 기쁨을 생각하면 기꺼이 고난에 참여하겠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서신을 남기지 않아서 영광에 관하여 어떤 말을 남기지 않았지만, 사도행전 12장1-3절에보면 야고보는 순교로서 영광을 드러냈던 자였습니다. 학자들은 그를 언급하기를 “그는 급하고 이기적인 성격이었으므로 예수는 그에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지어 주기도 하셨다”고 했을 만큼 성급하고 이기적이었지만 그런 그의 장점은 제자들 중 최초의 순교자로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 그 자체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등한 광채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고, 바로 볼 수 있고, 바로 만날 수 있고, 바로 대화할 수 있는 ‘진정한 영광의 통로자’셨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의 광채였습니다. 누구든지 그 빛에 거하는 자가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던 요한, 베드로, 야고보는 산에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나중엔 성령안에서 영광스럽게 살아 가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2.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0-36).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하자 본문말씀에서는 “문득(카이 이두)”이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상황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무언가에 집중시키고자 할 때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선생님이 수업하면서 상황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도 다시 핵심적인 것으로 집중시킬 때 “주목”이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본문 말씀은 핵심적인 것을 “보라, 볼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어입니까? 무엇에 주목하라는 것입니까? 30절,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외ㅏ 엘리야라”. 본문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말하는 것”에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자였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주제는 “별세”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로 어떻게 죽으시며,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십자가로 완성하실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말씀속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셔야 하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의 예언이 십자가의 희생으로 성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로 영광을 이루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며 우리도 따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후 무한영광일세”
(1) 저는 그 다음 전개되는 사건들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이 필요할 수 밖에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32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어릴적에 공부시간에 왜 그렇게 졸음이 오던지, 선생님은 열심히 수업하시는데, 나는 왜 그렇게 졸았던지… 너무 졸려서 나무 밑에 잠자는 소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저를 깨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난 주일 졸고 있었던 분 한 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도 조는 것에만 멈추게 하시지 않게 하실 것이고, 위대한 일에 쓰실 것을 믿습니다!! *설교시간에 졸았던 유두고를 아십니까? 그 청년은 3층에서 떨어져 죽었지만 바울은 기도로 살렸고 그가 살아난후 그 살아난 모습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2) 오늘 보고 있는 세명의 제자들도 똑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부족한데 32절,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두 사람”을 보고 다시는 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사람을 깨웁니다. 그러나 이런 영광의 광채 때문에 깨어 났었어도, 그 영광을 십자가(복음)으로 듣지 않으면 “하늘의 영광을 땅의 영광으로 바꾸어 버릴 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영광의 사건을 복음안에서 해석하지 못하고, 그만 하늘의 영광을 땅의 영광으로 바꾸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복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하늘의 영광을 땅의 영광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영광을 주도하고, 자기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너무 좋아서 그럴 수 있겠지만 여기서 지내는 것보다 더 좋은 곳이 있지 않겠습니까!!!
(3) 그때였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었더니 그분들이 구름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심히) 무서워 떨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제자들의 눈에 나타난 것은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졌지만 오직 예수님만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증인으로 출범할 때까지는 때를 기다려야했기에 이 영광스러운 장면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속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그곳이 교회이던, 직장이던, 학교이던, 가정이던지간에 그 안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 십자가를 지지않고 영광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땅의 영광만을 움켜잡고 살게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내일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생명도 중요하겠지만 영생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졸았지만,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택하 자녀를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구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광스럽게 살고,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에 영광속에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위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세상속에서 영광의주 예수님을 믿게하심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사오니 영광스럽게 살고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게하옵소서! 그러나 땅을 벗하며 살며 인간의 연약함에 제한을 받고있기에 더욱 성령충만, 기도충만, 말씀충만하여 예수님을 따라는데 따르는 시험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신 영광의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