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한 욥
본문
욥1장1- 22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3-07-09

 

욥1장1- 22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한 욥

Job 1:1-22 Job Overcoming Adversity with Faith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고, 행복과 불행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와 사단의 역사가 뒤섞여서 혼재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롭게 살아가는 자에게 원인 모를 악재가 연속으로 찾아오고, 어떤 경우에는 흉악한 자들에게 좋은 일만 찾아오는 것을 볼 때는 정말 하나님이 공의로우실텐데 이렇게 불공평한 대우를 하실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자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연구발표를 해서 펀드를 받으려했지만 등수에 들지 못해 좌절했다고 했습니다. 왠지 마음이 쨘해서 “제가 더 죄송스럽다”고, “자매님 곁에 우리가 함께 지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제 글을 읽고 ‘힘이 된다’고 ‘다시 일어나야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사관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좌절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하지 못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찾아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결코 이런 분이 아니실텐데, 내가 뭔 악한 짓을 했었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사람(동명이인)으로 착각을 하셨을까? 우리는 욥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인물 소개(1-5)

욥은 우스 땅에 살았습니다. 그가 가정에서 제사장역할을 했고, 그는 부유했고, 율법없이 개인적 신앙전통을 가지고 신앙생활했던 것을 보게되었고, 그의 나이가 약 210세를 살았던 것을 보면, 이렇게 볼 때 175세를 살았던 아브라함과 동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욥의 이름의 뜻은 “재난을 당한자”라는 의미를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이름 따라 들려줄 이야기가 순탄하지는 않는 고난, 재난, 재앙의 이야기가 나올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어떤 사람입니까? 1절 말씀 중반절에 보면,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했습니다. 2, 3절 말씀에 보면, “아들 일곱, 딸 셋”이 있었고, 그의 소유물로는 양이 칠천마리, 낙타가 삼천마리, 소가 오백겨리, 암나귀가 오백마리 그리고 종들도 많아 동방 곧 이스라엘의 동편지역에서는 재산이 많고 인격이 좋은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가진 것 많고 인격까지 좋은 사람이 신앙까지 투철하였습니다. 4, 5절을 보면, 자녀들이 생일잔치한다고 모여서 먹고 마시면서 혹여 하나님께 범죄하는 말이나 불연중에 먹었던 마음의 소리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거나, 말로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마음으로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였을까 염려하며, 생일이 마치면 바로바로 정결예식을 위하여 각자의 명의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항상 그러했다하니 욥의 신앙이 진정으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있었던 자였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행위가 옳다해서 하나님의 의를 충종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행위가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로서 다 증명하거나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알수 없는 비밀속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행동을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아닙니다.

 

2.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 곧, 천상의 대화 (6-12): “욥을 사탄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

본문은 천상의 장면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모인 장소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적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사탄이 천상의 의로운 사역자들 모임에 몰래 끼어들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초청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천상의 의로운 사역자들 모임에 의로운 가면을 쓰고 끼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르시지 않으셨고 그와 두번의 대화를 통하여 그의 존재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첫째 대화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어디서 왔느냐?”. 그때 사탄은 대답하기를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고 했습니다(1:7). 하나님이 사탄이 어디서 왔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의 존재가 무엇인지 스스로의 말을 통하여 자신의 악함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사탄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역합니다. 사탄은 정녕 아무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하나님을 반역하게하는 일만 만들며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는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의도, 사역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다가 이곳에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전서 5:8절처럼 “여기저기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사자”처럼 말입니다.

둘째 대화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소개합니다. 8절입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호평하시니까, 사단이 반박(악평)하기를 9-11절입니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반박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취는 욥은 특별한 존재였는데, 사탄의 눈에 비취는 욥은 Give & Take로 살아가는 자로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손으로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손으로 욥의 소유물을 치시면 틀림없이 주를 욕할 것이라고 호언장담(豪言壯談)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취는 욥은 마음 중심으로 섬기는 욥을 이야기하는데, 사탄의 눈에 비취는 욥은 소유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제안합니다. ‘하나님, 복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욥이 하는 손위에 복을 주시니깐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복을 다 빼앗으면 그럼 욥은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제한적인 허용을 하십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너의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너의 손을 대지 말지니라”하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가진 것을 뺴앗길 때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앞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할지라도 욥을 생각하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의로운 욥을 사단의 손에 맡기셨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마귀와 대화를 하고, 마귀를 즉각 처단하지 않으시고, 그가 어떤 짓거리를 할지도 모르는데 욥의 인생을 맡기셨냐 말입니다. 욥은 아무것도 모른채 사탄의 손아귀에서 일상이 망가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지고, 재물을 다 잃어버리는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해야하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으로 구원을 완성하시며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저는 욥이 이 상황을 통하여 하늘의 소망을 보았고 얻게 되리라 확신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3. 이해할 수 없는 고난 (13-19): “고난의 연속성과 절망성”

성경 본문 13절을 보면 천상대화에서 지상생활로 장면이 전화되면서 고난의 사건속으로 우리를 주목시킵니다. 욥의 맏아들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초청을 받고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십니다. 종들은 소를 끌고 나가 밭을 갈고 또 다른 종들은 나귀를 끌고 나가 풀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평안을 깨뜨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갑자기 스바사람들이 쳐들어와 소와 나귀들은 빼앗고, 종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종 하나가 욥에게 가서 알렸습니다. 1) “주인님, 스바사람들이 소와 나귀를 빼앗아가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나만 살아남아 이렇게 아뢰러 왔습니다”. 2) 이 말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 있었던 종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주인님,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양과 종들을 태워버렸습니다. 나만 살아남아 이렇게 아뢰러 왔습니다”. 3) 이 말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 있던 종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주인님, 갈대아 사람들이 세 때로 몰려와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나만 홀로 살아남아 이렇게 와서 알려드립니다”. 4) 그리고 이 말을 하고 있는데 집에 있던 종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주인님, 갑자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불어오더니 집 네 모퉁이를 무너뜨려 자제분들이 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만 홀로 살아남아 이렇게 찾아와 알려드립니다”.

16절, 17절, 18절에 보면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라고 3번이나 강조하며 고난이 연속적으로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절, 16절, 17절, 19절에서는 “나만 홀로 피하였음으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라고 4번을 강조하며 고난을 통하여 좌절과 낙심과 절망상태로 밀어 넣어버리는 사단의 손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요셉이 미움받아 형제들의 손에 끌려 구덩이에 밀쳐 떨어졌듯이, 욥은 사단의 손에 끌려 좌절과 낙심과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좌절과 낙심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팔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조롱을 받으시고, 군병들에게 끌려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사탄은 승리했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절망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을 믿었습니다. 

한번은, 개가 먹던 밥그릇을 뺏으려 했더니 ‘으르렁’ 거립니다. 아이들도 재밌게 놓던 장난감, 핸드폰, 게임기, 노트북을 빼앗으면 ‘으르렁’ 거립니다. 오늘 우리가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을 때에 ‘으르렁’거리지 않겠습니까! 사탄은 욥이 가진 소유물, 욥이 소중하게 여기던 자식들을 빼앗아버리면, 반드시 하나님께 “으르렁”거릴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4. 욥의 반응 (20-22): “신앙으로 극복하고 찬송으로 승화"

욥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고난들이 마치 재앙처럼 여겨졌을 텐데, 이런 재앙이 왜 찾아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몰랐습니다. 그때 욥은 자신의 철저함보다도,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며, 여전히 부족함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고난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보인 신앙의 반응은 20절에 나타납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했다고 기록합니다(20). 

욥이 보여준 신앙의 반응은 전통성(Traditionality)을 따랐습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는 방식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이방사회의 문화속에서 일부 받아들여진 행동들이었습니다. 욥은 문화적으로 사회풍습을 배제하지아니하고 어느정도 수용하면서도 악한 문화속에 빠지지 않았고, 자신만의 신앙방식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또, 욥이 보여준 신앙의 반응은 신본성(Theism)을 따랐습니다. 신본성이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유권안에는 주권, 통치, 섭리, 신적 재량권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29:6; 64:8절과 예레미야18:4절 그리고 로마서9:21절에보면,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재량껏 만들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재량껏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11:36절에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했습니다. 이와 같이 욥의 신앙은 외적 전통성과 내적 신본성으로 반응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며,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앞에 드리며, 찬송으로 승화시켜나갔습니다. 우리 함께21,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결론

우리는 살면서 이해되지 않는 일이 꽤나 많습니다. 사람관계속에서도 비밀이 많은데 하물며 천상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굴속에 뭐가 사는지 알 수 없듯, 가시적인 것도 모르는데 하물며 천상의 계획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쩔 때는 사단의 손에 이끌려서 이해할 수 없는 구렁텅이를 경험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죽어버릴 생각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나는 연약하기에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철저함과 투철함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애매하게 고난 받아도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로 그 결과는 아름답게 열매 맺힐 것”입니다(벧전2:19).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고 그 죽음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그를 믿는 자에게 다시 사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고난 받는 자가 있으십니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앞의 고난을 극복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너무 힘겹고 버거운 고난이 닥쳐졌을지라도 여러분의 입술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실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세상을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칠 때 우리의 나약한 믿음으로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욥의 큰 믿음에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좌절, 낙심, 절망의 구덩이에 있는 자, 죄와 불신으로 고통속에 있는자, 아무 이유 없는 시험에 빠진 자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사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사 영생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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