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서로 사랑하라!
본문
요13장34-35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2-11-27


요13장34-35 서로 사랑하라!

John 13-34-35 Love one another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두 사람만이 달콤한사랑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 내가 원수라고 여기는 사람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영국속담처럼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하고, 한달을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일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고, 일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려면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이 주는 행복은 이발소와 결혼과 말 그리고 집이 주는 행복이 없더라고 하나님만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거역하고 배신하고 떠나버린 자들까지 참아 기다리는 하나님, 원망불평하며 대적하고 핍박하고 원수노릇하는 자들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따를래야 따를 수 없는 사랑일 것입니다.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샘물흐르네,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생물흐르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고, 남편 혹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직장상사와 동료들을 사랑하고, 사장과 종업원을 사랑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 일지라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조건적일 수 있고, 한계성을 느낄수있고, 이익을 계산할 수있고, 차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성령충만하고 은혜충만했던 초대교회안에서도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서로 원망하며 다투는 일이 일어났던 이유가 불공평하다고 느꼈기때문이었습니다. 헬리파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교회가, 사도들이, 교회지도자들이 우리를 너무 소홀하게 여기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던 것이 이유였습니다(행6:1). 사실 교회가 이 땅에서 모두에게 잘해주려고 하지만 그들의 요구에 다 만족시킬 수 없는 한계성이 있기마련이거든요! Ex)마치 어릴적 철없던 시절에는 저도 어머니가 형에게는 잘해주면서 나에게는 너무 소홀하다는 느낌을 받았기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생각하면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6자식들 모두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햇빛을 비춰주시고, 단비를 내려주시고, 공기를 주셔서 살게 하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사랑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특별한 자들에게는 특별한 사랑으로 다가가셔서 더 섬세하게,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심령을 어루만지시며 사랑을 공급하십니다.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폭풍과 위기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자녀들을 품에 품어 안으시며 보호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셨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던가요? 어떤 하나님으로 오셨던지간에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셨고 사랑으로 눈으로 지금도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사랑”이란 주제로 마지막 시간을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3가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중요한 말씀을 함께 깨닫고 순종하여 변화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첫째)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둘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셋째)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내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해드리겠습니다.

 

1.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34상)

34.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새계명의 “새/new”것은 한번도 써보지 않은 것, 혹은 비밀리에 숨겨둔 것을 세상에 처음으로 계시하는 것을 말씀할 때 “새”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마치 신약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구약성경 레위기서 19:18절에 “원수를 갚지말며, 동포를 원망하지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셨는데 굳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이것을 “새”짜를 붙인 “새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문자적인 계명이 있었지만 이루어 낸 사람이 없었기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오직 한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어 내셨기 때문에 “새”짜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옛계명이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중심에 맞추어 사랑하다보니 조건적이고 제한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만 사랑받아야하고 이방인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럴수록 율법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해석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3-25절을 보면 “피해를 당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으로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을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 : 단순히 이 말씀만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대치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낙태되어버린 산모의 괴로운 심정을 사실 무엇으로 보상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돈 몇푼으로 낙태당한 산모의 고통이 해결되겠습니까?? 율법이 아무리 철저하게 갚아준다해도 다 갚을 수 없지만 최소한으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위로해주는 것 일 따름일 뿐입니다. 

새계명이라함은 조건과 제한적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이방인일지라도 차별없이 사랑하는 무제한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새계명이 가르치는 사랑은 수동적이거나 반사적이기보다 적극적, 능동적,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려 상대를 살려내는 것에 힘이 실려 있는 사랑이 새계명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동의없이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셨던 사랑이었기때문입니다. 마태복음5:38절부터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38-48)

새계명은 옛계명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옛계명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옛계명을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완성하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온전함으로 나아가야하기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7:25절에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8:1-2절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을 경험했기때문입니다. 옛계명 곧 율법은 우리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사 율법을 완성하시는 사실을 성령으로 믿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사 죽으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그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에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새계명은 옛계명의 완성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적용)여러분 마음속에 옛계명만 남아있다면 지극히 제한적, 조건적, 차별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바울을 깨닫게 하셔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구원을 요청했듯이, 오늘 하나님은 우릴르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어 주실 것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고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신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몸의 행실(태도)를 고치시고 죽여 꺼꾸러뜨려서라도 고쳐 사용하실 것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34하)

3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에서 “~같이”라는 말은 ~처럼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해보려해도 도대체 뭔가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을때가 있단 말입니다. Ex)아내가 새차를 구입하고는 작동법이 10년 상간에 이렇게 많이 바뀌었나 할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하셨던지 몇일간은 차를 못 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작동법만 배우니깐 자연스럽게 잘 몰게 되어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뭔가 새계명이라고하면 거부감이 생겨서 옛것만 고집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것에 순종하고 익숙해지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잘 적응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할때가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같이”하라는 기준, 척도, 모범이 있으면 됩니다. 나도 이렇게 했으니 너도 나 처럼 이렇게 해보라는 모델이 있으면 따라하면서 배울 수 있는데, 바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완전히 딱 맞는 모델이 있으니 “예수님”이 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천국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우물가의 여인도 이 남자 저 남자만 붙잡기를 벌써 6번째 남자와 만나 살지만 진정한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7번째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서야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도자가된 것입니다. 그후 그녀의 삶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방황은 끝이났으리라 확신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회피하며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동안에는 얼마나 본인 스스로도 죄책감으로 살았겠으며, 사회적으로는 얼마나 시선이 부끄러원 피해다녔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진정한 생수가 예수님이라는 것과 진정한 남편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 진정한 예배장소는 예수님이 계신 바로 지금 이곳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일어났고 뛰어가 마을 사람들을 만나서 이 기쁜 소식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이방인 같은 사마리아에 수많은 심령에 복음이 심겨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4:39) . 예수님을 만나면 더 이상의 방황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에 적용하자면 우리의 방법으로는 사랑의 한계성을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시고, 그 길을 따라 서로 사랑하신다면 내 방법보다 어렵다고생각 들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해보면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3.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 인줄 알리라(35)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알기를 원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 너희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니깐 너희도 예수쟁이구나!“ 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 차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예수믿는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이 교회는 예수따르는교회네! 예수하고닮았네!” 그런 말이 세상으로부터 들려 나오기를 예수님이 원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먼저 나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나의 가정속에 사랑이 흐르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속에 사랑이 흐르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현장속에서 사랑이 흐르고 있어야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을 바로보는 세상이 여러분을 볼 때 “너의 모습만봐도 예수쟁이네”라는 말이 흘러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그 표시가 뭐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표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표시가 아니라 그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만큼 십자가의 사랑을 흘러보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할례와 의복을 표시로 구별되어 살았습니다. 헬라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철학과 지혜를 표시로 구별지어 살았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를 표시로 구별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런 것이 표식이 되어 살아서는 안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것이 표식이 되어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이 표식이 되어 세상속에서 우리가 예수제자라는 것을 전하며 사는 교회가 되라, 제자가되라, 성도가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한 달을 보내면서 세상을 향하여 서로사랑함으로 예수의 제자라는 소문이 나는 교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백지영 작가는 [작은 아씨들]이라는 드라마속에서 “충분한 사랑”이란 글을 실어서 읽어봤습니다. 가난속에 자란 세자매의 사랑이야기였습니다. 가난속에 엄마의 사랑은 무책임하고 답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고, 가난 속에 두 언니는 가불까지 하면서 막내동생 수학여행비를 만들었던 사랑도 부족함과 부담을 느끼게 했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만족할 만큼 채워주지 못하지만 진실함이 담겨있는 사랑이라면 서로를 지켜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생각하며 마음을 기도했습니다.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되게 하소서! 인색한 마음이 넓은 마음되게 하소서! 분노한 마음이 따뜻한 마음되게하소서! 나의 마음에 사랑하는 마음을 주소서! 우리 가정에 사랑하는 마음주소서! 우리 교회에 사랑하는 마음주소서! 내가 살아가는 그곳에 사랑이 흐르게 하소서! 

 

기도

사랑의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 갑니다. 사랑해도 모자랄 시간마다 딱딱한 마음으로 인색한 마음으로 분노하며, 악하고 게으르게 살았던 심령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의지하여 사랑하는 개인, 가정, 교회로 발돋움하여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의 제자됨을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다 드려 우리를 구원하시고 생명주신 우리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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