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2)
본문
딤후4장1-8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2-12-18


딤후4장1-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Ⅱ)

2Timothy4-1-17 For I am already being poured out like a drink offering (Ⅱ)

 

바울은 하나님께 관제와 같이 자신을 전적으로 다 드렸습니다. “관제”라는 말 속에는 바울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마지막 죽음을 맞이 할 것인가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죽음은 마지막이란 뜻도 있지만 새로운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지난달에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하던 때 [이진희목사의 ‘광야를 읽다’]를 잘 읽었는데 읽은 김에 ‘사랑’이란 단어가 몇 번 나오나했더니 1번나왔다고 했었습니다. 1번 나왔어도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혜가 다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같은 저작자의 2번째 저서 [광야를 살다]를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헌신”이란 단어가 몇번 나왔을까 생각해보니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웠던 이야기는 “예수님의 광야”중에 보면 -가난과 불편의 광야- 가 나오는데 그 내용 중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사셨더라면 매일 성전에 올라 가셨을 텐데, 나사렛 시골에 사셨기 때문에 그러실 수가 없었다.”그러면서 이런 이야기 하나를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100년전 루비 켄드리(Ruby R. Kendrik)이라는 여선교사 이야기였습니다. 루비는 20대에 조선 개성에 와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선교사역을 시작하던 중 8개월정도 되었을때 텍사스 선교대회에 편지 한 통을 보냈고 선교대회는 루비 선교사의 편지내용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를 받아본 그 다음날 다시 소식이 전해오기를 루비 선교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선교대회는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후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양화진에는 그녀의 무덤 위에 “만약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그 편지내용의 문구를 기록해놓았다고 합니다. 내가 처한 곳이 아무리 낮고 낮아도 그곳에 내 생명이 천 개가 있어도 천 개 모두를 다 이곳에 드리겠다는 것이 헌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처한 자리가 아무리 낮아도 생명을 다 바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헌신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누군가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가 누리지 못할 것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제도 교회에 꽃갔다 놓으려고 갔더니 누군가가 교회를 왔다 갔는 모양이었습니다. 맛있는 냄새가 교회 안을 진동 시켰고 냄새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벌써 국이 두 국통에 끓여져 있었고 큰 접시에 반찬을 가득담아 놓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남모르게 와서 조용힌 헌신하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매주 이렇게 헌신하는 손길들을 붙여주셔서 우리 모두가 맛있는 정성을 먹게하시니 감사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 공동체와 다른 것은 세상의 비즈니스는 돈을 받고 일을 하는데 교회는 헌금을 내면서 봉사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구조는 세상적으로보면 딱 망하기 일수인 조직인데 어떻게 이렇게 생기가 느껴질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고 영생받은 자들이 감사함으로 헌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며 경배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헌신하는 여러분들 위에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1. 헌신은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7) 

 

헌신적인 일을 할 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일이 사람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던지, 아니면 어떤 물리적인 일을 하는 것이던지, 아니면 내 마음속의 일어나는 감정의 문제던지, 아니면 그냥 아무 걱정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던지 간에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믿음이 깨져버리거나 믿음이 없으면 더 이상 믿음의 선한 일을 할 수가 없어 의심, 오해,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던지 “선”한 일을 만들어갈 수 가 없습니다. 

 

1) 축구경기를 하는 자들이 선한 경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룰이 필요하고, 주심과 부심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격한 경기를 하고, 몸싸움을 하며 점수를 높이기 위하여 부딪히며 싸우더라도 선한 싸움으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진행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심과 부심은 하나님의 교회를 질서있게 세워나가게 하시려고 보낸 자들입니다. 경기를 하다가 서로 뒤엉켜 있으면 주심이 뛰어가 호루라기를 불며 잘잘못을 가려 줍니다. 주심이 결정 못하면 모니터링을 하면서 정확하게 경기를 이끌어갑니다. 내 마음에 안들어도 다시 일어나 경기에 임하고 경기장을 박차고 나가지 않습니다.

 

2) 또 하나는 전쟁에도 선한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전쟁이 무슨 선한 전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쟁에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습니다. 함부로 핵폭탄을 운운하거나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나라간의 무언의 질서이며 규칙입니다. 만약 러시아와 미국이 핵전쟁이 일어나면 인류 70%는 멸망하고 맙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북한은 툭하면 “불바다를 만들어버리겠다”고 하고, 러시아도 조금만 신경 거슬리면 핵전쟁을 해버리겠다고 합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공동성명을 핵전쟁 금지를 발표했었는데도, 자기 분에 못 이겨 핵 버튼을 누르게 되면 세계 80억인구중 50억이상은 다 죽습니다.

제가 왜 이런 무시 무시한 이야기를  설교에 하느냐면은, 오늘 본문에 사용된 “싸움”이란 단어 속에 이 두 가지의 살벌한 용어가 포함되기때문입니다. 그만큼 선한 싸움이 치열하다는 것입니다. 딤후2:3-5절에서도 “운동경기를 하더래도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공정한 경기 그리고 군사를 모집하더래도 좋은 군사가 되어 군사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드리는 군인이 되는 것은 선한싸움이 얼마나 공경해야하고, 얼마나 선을 넘지 말아야하고, 얼마나 영적싸움이 치열한지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싸울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고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한바 있었고, 그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이 된 지금에도 그는 이 싸움에서 회피하고 도망하거나 하지 않았고, 혈과 육체의 싸움으로 진전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며 30년을 그렇게 살아왔듯이, 이제 주 앞에 갈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했음에도 그 짧은 남은 시간마저 관제로 몽땅 부어드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몸에 지병도 있었고, 너무 힘들고 어려운 조건 속에 있었지만, 끝까지 자신을 드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 었겠습니까? 그것은 이 싸움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였습니다. 이 싸움은 선한 싸움이고, 영광된 싸움이고,  이미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이긴 싸움이고, 이 싸움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지금 당장은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하며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끝까지 헌신된자로 다 드리기, 또 드리기, 더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싸움을 십자가로 이룩하셨고, 자신을 어린양처럼 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주셨고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이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길 줄로 믿습니다!

 

2. 헌신의 면류관은 의의 면류관입니다.(8)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네 글자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믿는 자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아 1) 구원함을 얻을 뿐 아니라 2) 의의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 의의면류관은 나의 공로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믿음으로 주어지는 면류관입니다.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생각하면 나의 공로는 전혀 없이 받는 면류관이 의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와 믿음은 성령 안에서 우리를 다 드려도 부족하다하시며 하나님께만 영광돌리게 적용하시기 때문입니다.

 

2) 의의 면류관은 지금은 예약 받은 면류관이지만, 장래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수여하시는 면류관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녀들을 키워가면서 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번 학기를 마치면서 졸업식 날에 당신의 자녀가 상을 받게 될것입니다. 그러면 그날은 부모형제 참석해서 축하해주고 본인은 예쁜 옷을 준비해서 입고 시상대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축하해주지만 내 자녀가 상을 받을 때면 앞으로 나가서 사진도 찍고 축하도 해줍니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면류관은 지금 당장은 받지 않지만 몇 일 후 졸업식 날에 이르면 시상대에 올라가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지 않겠습니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3)”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에는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상받기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을 다했지만, 어떤 사람은 면류관 대신에 책망만 받고 시상식장에서 쫓겨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한 달란트”받은 자가 악하고 게으를 때 일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지 않는 데서 모으는 사람이 아니란다. 네가 하지 못할거였으면 할 수 있는 사람한테 맡겨주기나 하지 왜 너는 너도 못하고 남도 못하게 움켜 잡고 있었느냐, 여봐라! 저 자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무익한 종은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5:26-30)” 내가 헌신 할 수 없다면 헌신할 수 있는 자에게 권한을 넘겨주고, 그가 잘 할 수 있도록 전심으로 기도해주고, 도와주고, 섬겨준다면 그 또한 작은 헌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름받은 사람은 장래에 받을 의의 면류관을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나는 면류관까지는 필요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나는 면류관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면류관을 위하여 자신을 관제와 같이 부어드리는 헌신자를 위하여 기도와 시간과 물질과 힘을 당하여 도와주어야 칭찬이라도 받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20: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니라”하며 자신의 안위를 조금도 생각지 않고, 생명을 걸어 복음위해 바칠 수 있었고, 이제 인생의 졸업식이 있는 그날에 내가 받을 면류관을 생각하면서 전심전력을 다해 주님을 사모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울 자신의 명예로운 일을 준비한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처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도 면류관을 주시기를 축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

“인간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일지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며 신속하게 가니 날아간다”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30세에 회개하여 주의 사역을 시작했고 60세에 순교 당해 죽었으니 30년의 그의 사역은 정말 그렇게 길다고 볼 수 없습니다. 30년이 금방 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고 짧음보다 그가 순교하기까지 30년의 사역은 천국에서는 영원한 보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고독사로 죽은 남자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5년전과 비교해서 40%이상 늘어났는데 그 중에 50대 남자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60대, 그 다음이 40대, 그 다음이 70대, 그 다음이 80대 이상이라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도바울의 이 마지막 질문을 해봐야할것입니다. 8절에서 말씀하듯이, “이제 후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이제후로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마지막을 끝내는 삶이 되어야 할까요? 1) 관제와 같이 부어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2)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3) 의의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해 주님을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끝날까지 부어드리고, 믿음을 지키속, 주님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사도바울의 헌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헌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헌신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헌신이 아니었는지 우리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바울처럼 예수복음 위하여 헌신된 자 되어 마지막 남은 한 호흡마저도 다 주님께 부어드리는 관제 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피한방울까지 다 흘려 주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 이름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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