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전에
읽은 책중에서, 팀 켈러는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관하여 나귀의 비유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종려주일
다음날 월요일에 작은 나귀가 기분 좋게 일어나 시장거리를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제와는 달리
자기를 눈 여겨보지 않았습니다.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더 당당하고 자태있는 모습으로 걸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때리며 “왜 시장 거리에 들어왔냐 저리 꺼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위한 목소리로 “겉옷을 깔아 어서, 내가 누군지 잊었어?”라고 큰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귀를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상처받은 나귀새끼는
집으로 돌아가 엄마 나귀한테 말했습니다. “엄마, 이해가
안돼! 어제는 사람들이 내게 옷을 깔아주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할렐루야 하더니 오늘은 아무것도
아닌듯 쳐다보기만 해! 왜 그래?” 엄마 나귀가 말했습니다. “그가 없이는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알겠니?” :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영광스런 내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그때는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성령의 핵심 난제들”이란 책에서 십자가의 오해를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왜 지셨는가? (나를 위해
지셨지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죄인이지요!) 그런 신비로움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아들을 죽인 ‘아동폭행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식 살인자고, 자식은 아버지의
폭행의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폭행자가 되고 예수님은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형벌을 주는 이야기가 되고 신약성경은 희생당하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이런 구조로 이해하면 바른 복음으로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영적혼란과 왜곡신앙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체 그림속에서
부분적 사건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십자가의 오해가 풀려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고, 십자가 안에서 실제적인 치유와 평화와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의 특징을 살려 주변환경과 역사적사실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 사람이 누구냐(10)”라는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1-9)
예수님은 본문 앞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두명의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몇일 후 죽음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사역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원구원과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룻길을 걸어 감람산
벳바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2명의 제자를 동네에
보내시며 한 가지 일을 지시합니다. “동네에 가면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을 것이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관점에서) 어미 나귀를 끌고 오면 새끼 나귀는 자연히 따라올 것이기 때문에 두 마리의 나귀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나귀는 율법, 율법에 얽매인 유대인을 상징시키고, 새끼나귀는 복음으로 변화된 이방인들, 혹은 교회를 상징시키기위한
마태의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귀새끼만 언급하지만 마태복음만 나귀와 나귀새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교훈을 줍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처럼 끌어주었다면 복음은 살려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는데, “만일 누가 왜 풀어가느냐”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그가
즉시 주리라”고 한 것입니다. 막,눅)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네에 갔더니 정말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었고, 끌고 오려는데 “왜 풀어가느냐?” 묻길래, 예수님께서 일러주신대로 “주께서 쓰시겠다”하니 아무말없이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만 분명하게 기록하기를, 4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은 누구신가? 바로
스가랴 9:9절에서 예언한 “짐승의 새끼를 탔다”는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신 왕이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잘 훈련된 말, 멋진 말을 타겠지만, 예수님은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을 이루시려고 나귀새끼를 타셨던 것입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에 보면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가 거지가 되어 지낸 시간과 경험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처지를 깨닫고 백성들을 살피는 현명한 통치자가
된 것이 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동기와는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자로 자처하여 오셔서 복음을 전해주시고, 가난한자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시며, 소경과 절뚝발이를 고치시며, 죄인들과
함께 하시며 죄사함과 자유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안타시고 멋진 말을 타고 거들먹거리며 오셨다면, 가난한자,
절뚝발이, 소경, 죄인들의 심정을 전혀 몰랐을
것이고, 가까이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예언성취이기도 하지만, 만인을 향한 공식선언 이셨습니다. “나는 평화의 왕이다!”: 너희를 위한 나의 낮아짐은 죄인 된 너희를
살리며 병든 너희를 고처 자유케 하려함이라. 더 나아가 유대 민족적인 메시야만 되시려함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메시야가 되신다는 공적인 선언을 하신 것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나귀새끼야, 너는 나의 뜻을 받들고, 나를 등에 업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자!”하신 것이었습니다. 나귀 새끼가 가기 “싫어요, 무겁고, 내가 너무 약해서 안돼요”라며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없이 예수님을 등에 업으시고 뚜벅 뚜벅 걸어갔고, 예수님은
모든 열방과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뜻 받들어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길은, 이 시간은 가시밭길이지만 영광의 길이 될 것입니다.
2.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님(10-11)
4절을 다시보듯이 예수님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 곧 온전한 선지자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신 날이 주일(일요일)이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금요일로부터 5일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실 날을 알고 계셨고,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알고 계셨습니다. 낮아진
마음없이는 갈 수 없었지만 그 길이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말은 못타도 나귀새끼를 타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겉옷을 벗어 예수님 가시는 길목마다 깔고, 종려나무를 잘라와 깔아드리고 또 흔들면서 “호산나: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사람들은 소리치며 메시야의 입성을
축하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찬송하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평화의 왕, 영광의 왕이시라”노래하며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 속에서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아주고 호산나의 찬양의 함성을 받으셨지만, 장차 이루어질 새예루살렘에서 받을 영광에 비하면 정말 매우
조촐한 영광이지만 이것은 장래에 우리가 받을 영광의 그림자를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무리중 바리새인들은 이 조촐한 영광의 소리마저 불편해서 “선생님이여,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책망하소서”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들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하니라!
여기에서 나오는 무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성인정도로만 여기는 무리들입니다. 무리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도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밖깥에 머물러 있는 또 다른 무리도 있습니다. 그들은 찬양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고, 대적자 노릇하며, 복음을 거부하고,
진리를 거스르는 일을 좋아하고, 성령의 마음을 물리치고,
오직 자기가 왕이 되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 살리는
일은 하지 못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고난중에도
찬양, 기도, 말씀에 거하여 작은 선지자적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십자가
사건이 5일전으로 다가올 시점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
때문에 오셨고, 왜 십자가를 지셨고, 나는 누구이며, 내가 예수님과 어떤 실제적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가셨고 또 변화시켜 가실 분이 신지; 이번 한주간이 예수십자가안에서 예수발견, 내발견, 사명발견 하게 되어지는 한주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를 살려주시고, 고치시고, 사명주시고, 행복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한주간을 보내면서 나귀새끼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에수님을 등에 업고 십자가 밑으로 내려가 주안에 주시는
평화와 영광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로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