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나이에 맞게 성숙해가면 부모가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나이가 들어도 성숙하지 못하면 여전히 부모의 마음은 철없는 자녀 때문에 늘 걱정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최초로 성숙하지 못한 자녀가 있었다면 가인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육체 부모였던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볼 수 없었으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은 곧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반증을 전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인이 그렇게 견제하고, 불공평하게 생각하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의 질문에 반항했어야 했다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숙하지 못한 자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기회를 주시며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수신자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과거의 유대교적 신앙에서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가 기록된 당시는 A.D.65-70년사이였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30년~40년이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지 대략 30년이 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 박해는 갈수록 더 심해지자, 그들은 믿음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버릴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무리 어려운 박해속에서도 퇴보하지말고 성숙으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1.듣는 것이 둔하였습니다. (5:11-14).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그들은 듣는 것이 둔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깨닫는 것이 느려서 도저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오신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레위 계열이 아닌 또 다른 신령한 외부적 계열에서 등장한 제사장 곧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년을 믿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이 하신 일이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왕이요, 제사장 중보자되심을 깨닫지못하니깐, 삶속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셔드리지 못하고, 중보자 변호자로 믿지못하며 30년을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의 역사는 30년이고 돌아보며 적용해야할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속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왕으로, 중보자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집중하며 그분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민첩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연수가 30년이 되었으면 이제 신앙의 연륜에서 뿜어져 나오는 좋은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갓난아이처럼 투정부리고, 토라지고, 안아줘야만 하고, 다 컸는데도 업어주고, 어르러주며, 젖을 물려서 재워줘야 한다면, 우리가 변화시켜야할 사회가 도리어 우리를 보고 “다 큰 놈이 아직 어미품에 있냐”고 흉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성숙하지 못한 자와 성숙한 자를 구분시키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A. 성숙하지 못한자를 -젖을 먹는 자, 어린아이, 의의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자라고 했고, B. 성숙한 자들은 -지각사용하고, 연단을 받아, 선악분별이 가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자는 구약의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아오신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들었었음에도, 전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여전히 옛 율법전통에 얽매여 여차저차하면 율법전통으로 돌아가기에 쉬운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자 곧 말씀을 경험하는 자, 또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변화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자는, 더 이상 어린아이로 돌아가지 않으려하고, 장성한 자로 “지각과 연단과 분별”을 가지고(없으면 구해서라도), 닥쳐진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는 자가 되기를 기뻐하며,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박해를 이겨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2.완전한데로 나아가십시오. (6:1-3).
운동선수들은 몸의 근력운동을 키우기 위하여 여러가지 운동기구를 사용하듯이, 본문은 더욱 성숙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6가지 기본적 도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회개와 신앙, 세례와 안수, 부활과 심판이란 주제들이며 그리스도에 관한 기초 교리입니다.
본문 6: 1,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기초 교리가 중요한데 그 기본적인 것을 버리라고 했고, 다시 배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기본 교리가 필요 없다거나 무시되어도 된다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도리어 기초 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그런 기본적인 교리를 무시하는 듯하게 들립니까? 그 이유는 1) 안주하지말란 말씀입니다: 성숙해가기 위해서는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안주해버리면 더 이상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고 자기가 메시야가 되기때문입니다. 2) 기초교리가 마치 구원의 완성이라고 숭배되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초 교리의 정신보다 외식적 행위가 구원을 주지 않기때문입니다.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알고 행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3)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방향을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성도는 완전함으로 계속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안주하면 안 됩니다! 죽어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 삶의 열매가 견실하게 맺히는 순간까지, 우리는 완전한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숙함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만 이룰 수 없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성숙입니다. 아무리 심고 물 줘도 자라지 않으면 열매도 없고, 물만먹다가 썩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심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허락을 구하며 살아가야합니다!
3.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십시오. (4-8).
본문 6:4-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어도 다시 타락할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속에서 이렇게까지 힘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까? 내가 은혜를 잘못 받았나? 아니면 은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떻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받은 자가? 예수그리스도의 도를 받은 자가? 죽은 행실을 회개한자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세례, 안수, 부활, 심판을 믿었던 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죽여 욕보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받은 자가 성숙되어가지 못하면 우리도 이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숙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7절말씀처럼 “땅이 그 위에서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해야 합니다. 땅의 신비가 여기 있습니다. 땅은 신비하게도 비를 흡수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열매를 맺힙니까? 첫째는) 밭가는 자가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냅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복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둘째는)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버리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들은 밭가는 자가 쓰기에 합당치 못하기 때문에, 버림받고 저주받아 불사름으로 끝나는 경우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가지사 알곡은 안으로, 쭉정이는 밖 깥으로 끄집어 내 불로 태워 버리신다(마3:12)고 하셨습니다. 다시 본문8절에보면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범죄했을 때 전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①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했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가죽옷의 사랑을 받았기때문입니다. ② 가인도 동생을 죽였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사회에서 죽임당하지 않을 표를 받았습니다. ③ 다윗도 범죄하였어도 말씀앞에 회개함으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①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드릴 때 다른 불로 제사에 분향했다가 불이 나와 그들을 단번에 죽였습니다. ②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작정헌금을 드린다고 했다가 일부를 감춰놓고 다 드린것이라고 거짓말했다가 거꾸러져 죽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부름받고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용서함을 받고, 어떤 경우는 용서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못하지만, 그 일이 내게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때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다 올바르다 생각했었어도 그것이 하나님편에서 거룩성에 돌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럴때 그런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풀어가야 할지 우리는 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9-12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 곧 영생천국이 우리에게 있다고 확신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실망하지마시고 각자의 역할에서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시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거하며, 게으르지말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의 기업 받을 자들을 본받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아무쪼록 이 말씀이 우리 교회 30년의 몸집에 걸맞는 성숙함으로 인도받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우리는 첫째로) 듣는 것이 둔해진 감각을 다시 깨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기위하여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지각과 연단과 분별을 사용할 줄 알아야합니다. 둘째는) 완전한데로 나아가야합니다. 기본적인 교리를 알고, 제자훈련받고, 직분을 받되 결코 안주하려고 하지 말아합니다. 사명이 끝나는 날까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셋째는)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해야 합니다. 한번 은혜받았다고 영원히 보장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번 은혜받았어도 타락할 수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자는 매일 엎드려 회개에 합당한 열매맺기를 구해아합니다.
기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를 날마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이 우리를 마비시키는 이때에,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듣는 것이 둔한 감각을 깨워 주소서! 완전한데로 나아가게 하소서!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더 좋은 구원 곧 영생천국을 바라보며, 교회를 부지런하게 섬기게 하옵소서!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칭찬과 기업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