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간에 [이진희 목사님의 광야를 읽다]를 읽고 광야 인생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내용과 함께 설교 주제에 맞는 “사랑”이란 이야기가 있을까도 염두해두면서 읽었습니다. 다 읽어가는데도 사랑이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딱 한번 “사랑”이란 말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테레사 수녀가 한 신부에게 보낸 편지내용에서 테레사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면서 신부를 위로해주는 내용에 사랑이란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테라사는 자신에게 힘들었던 순간이 “하나님이 매우 특별히 사랑하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침묵과 공허가 너무 큽니다. 보려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으며, 혀를 움직이려해도 말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원합니다” 테레사 수녀도 영적으로 침체의 순간이 있었고 그때가 하나님이 매우 특별히 자기를 사랑하는 때라고 말했습니다.
책에서는 사랑이란 말이 딱 한번 나왔지만 모든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지켜주시고 먹여주시고 인도하시고 .. 그래서 광야에서는 생존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사랑타령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느낄 수 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속에도 하나님이 느껴지지않고, 보이지 않는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는 분으로 우리곁에 있으십니다. 내 뜻을 조금씩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인정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우리곁에 계신지 보이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순종하는듯 해보여도 저 니느웨 악한 놈들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알수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박넝쿨 교훈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룻밤에 방넝쿨을 나게하여 뜨거운 햇볕을 가려줬더니 좋아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벌레를 보내 박넝쿨을 다 갉아먹게했더니 짜증을 내면서 죽고싶다고까지 말한 것입니다. 너 왜 성내느냐? 했더니 요나의 말이 “내가 죽고싶은데 뭔 이유가 있나요?”(현대어로 좀 각색한 것임). 그때 하나님께서 깊은 교훈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네가 하룻밤에 생겨난 박넝쿨을 아꼈거든 내가 니느웨 백성을 아끼면 안되는거냐?”했습니다. 그 후에 요나가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까요?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기준과 어쩌면 내가 뭔가를 믿고 있는 신념까지도 내려놔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일4:7-12절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그 사랑이 어느 정도의 사랑이었기에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안에 사랑을 이루어가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7-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을 우리는 “중생했다, 거듭났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새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안다라고 말 할 수없습니다. Ex.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했다보니 거듭난다는 말에 “내가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나와야 되는거냐”고 물었던 것을 보면, 그는 전혀 영적인 것들에대한 앎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게되면 인간적인 사랑으로밖에 이해할수없지만,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기시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도하지못 할 일을 하셨는지 믿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비단 인간의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의 사랑으로 비유하자면 1)부모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 낼수있는 (이 땅에서의) 최고의 사랑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친구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또 하나가 더 있다면 아가서의 말씀처럼 남녀간의 죽고못사는(몹시아끼는사랑)사랑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할 수 있는 있겠지만 그런 사랑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때문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은 무조건 사랑하라는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 악행, 무질서, 교만, 억압, 불신앙으로 가고있는 자식이 있는데도 무조건 옳지 옳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의 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셨지만, 아버지께서 보내신길, 십자가의 길은 힘들어도 가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는 길이 아버지께서 보낸 길인지 내 멋대로 가는 길인지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고, 아버지의 보내신 길을 가는 사람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에게는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2.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9)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정확하고, 실제적이고, 확실한 표현이 어딨겠습니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모른다 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 눈앞에,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난바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을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요한복음3:16절 말씀하고 매우 흡사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사랑은 감추어두기만 하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종말이 되면, 마태복음 24:12절 말씀처럼,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했고, 디모데후서 3:1-2절처럼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지고 자기사랑, 돈사랑 하다가 말세를 보내다가 슬피울며 이를 갈 날이 다다를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건져 살려내는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1)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9).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불평하니 하나님은 더 이상 지켜볼수만 없어 불뱀을 보내 다 죽여버리려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했고 하니님은 살 기되를 주셨는데, “놋으로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고 쳐다보지 않는자는 죽게 되리라!”하셨습니다.(민21:4-9)
(영적으로) 나의 심령이 메마르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서 벗어나 살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목사이기에 설교하고, 교육하고, 찬양하고, 기도할 수 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지치고 피곤해서 낙심에 이르게 되었을 때 저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호통을 치셨습니다. “네가 안해도 교회는 돌아간다! 많은것을 하려하지말고 한가지라도 제대로 하라!” 하나님은 저에게 찾아오셨고, 죄를 깨닫게 하셨고 “원망불평하는 마음, 미워시기하는 마음, 낙심절망하는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죄”인지 호통을 치시며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사야서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희망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자기 심장은 꺼내 줄 지언정 자기 독생자를 내놓기란 쉽지 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2)하나님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셨습니다(9)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내가 생각하는 구원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하여도 하나님은 오직 “저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저로 말미암아서만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다윗도, 바울도 & 오늘 영적싸움을 하다 지쳐 닥쳐오는 시련이 너무 힘들다보니 그냥 이대로 죽겠다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은 것 같은 죄를 저질렀고, 아무리 희망이 사라져 사형선고를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죽은 자에게 소망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찬양)“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오셨네 주안에 생명이 있네,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 찾아 왔으니 사람들 영접 안했네. 예수안에 생명있네! 주님이 빛이 되시네! 예수안에 생명있네 주님이 빛이 되시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살리려 하심을 믿으십니까?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마음 문을 여시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함께기도)“예수님! 저의 마음속에 들어오세요! 저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습니다! 저의 영혼을 살려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10-12)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깨달아지는 것은 ‘나의 옛날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서운 하나님, 책망할 것 같은 하나님으로 마음속에 가득찼으니 하나님의 얼굴을 뵐 면목이 없어 피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형벌을 선언하셨지만 그들에게 무화과 나뭇잎을 벗기시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보았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사는 동안 그 사랑을 잊지 않고 제단을 쌓아 하나님과 화목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아무 의도, 아무 공로도 없는 처참한 지경속으로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사랑이셨습니다. 로마서 5:8절에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교회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사랑해도 얼마가지 못해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온전하게 세워져가는 우리교회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우리교회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세워가는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흐믓해하실까요! 그것은 본분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시대의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지고 녹이는 사랑의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죄인된 우리, 생명없는 저희들을 살리시려고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보내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거듭나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하시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세워가는 마지막시대의 사명감당하는 교회되게 하여주옵서! 우리구원의주 예수그리스도 이름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