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31-42 예수님의 시체(토)
*예수님의 시체를 대하면서;
장례식장에가면,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느끼게합니까?
"호기심이나서 볼수도있고, 나고 변화되어 살아가야지생각하기도하고, 이땅이전부가아니구나, 베풀며살아야자, 다 놓고가는구나, 세월을 아끼자, 예수님 잘믿어야지, 나도 이사람처럼 살아야지, 나는 이사람처럼은 살지말아야지"
빌리그레함목사님께서 미네소타대학에서 강연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오지만 그것은 생명으로 연결될수도있고, 멸망으로 연결될수도있다. 그러나 오늘 호기심은 생명으로 연결되어 변화될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주인공은 생명의 주 예수그리스도이시기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느생물학자는 씨앗을 들고 우리고 이와같은 씨앗을 질소, 수소, 탄소를 모아 똑같은 모양은 만들수있지만 그 속에 생명은 만들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것이 사도요한의 증거입니다.
35절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35절, 이를 본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너희로 믿게하려함이니라!
유대인들은 내일이 되면 안식일이고 유월절이었습니다.
그 해에는 안식일과 유월절이 겹치는 날이엉서 큰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에 오며 가며 구경할텐데 저런 사형수가 죽은것이 걸려있으니 저것을 치월달라고 빌라도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와서 두 강도는 다리를 꺽었고, 예수님은 다리를 꺽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온몸에 물과 피를 다 흘려보냈습니다. 사도요한은 바로 이런 사건을 중점으로 기록하는것은 예수님은 바로 죽어 시체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있습니다.
1. 첫번째 말씀의 교훈은 바로 죽을려면 완전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으려면 완전히 죽어야 그것이 부활을 할수있습니다. 부활은 대충 죽어서는 부활이라는 말을 쓸수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죽으려면 완전히 십자가에 함께 죽어야합니다. 덜죽어서 문제지, 완전히 죽으면 시체가 무슨 말을 합니까! 시체가 무슨 주장을 할수 있습니까! 시체는 죽은것이기때문입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죽는다는 말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죄가 완전히 해결된것은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셨기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에서 흘린피를 볼때 내가 죽을수 있습니다.
레위기서를 큐티하면서 , 우리는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속건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짐승을 데리고온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죄를 양에게 안수하여 물려주고, 직접 죽이고 털깍고 쪼개고 내장꺼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것을 불태워드리는 일을 하는것입니다. 죄를 다 양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했는데 양이 대신 죽는것입니다. 완전히 죽어져야합니다. 살아서는 안됩니다.
어릴적 어머니께서 닭을 잡으실때였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었는데 그 닭이 살은것입니다. 그래서 꺽인 목을 해가지고 도망가는데 향방없이 달려갑니다. 다시 잡아서 완전히 숨통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집어넣었다가 꺼내서 닭털을 다뽑습니다. 그리고 배를 깔라 내장을 꺼내고 씻어서 솥에 넣어 마늘넣고 푹삶습니다. 그러면 온 가족족들이 맛있게 뜯어먹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꼭 기억하실것은 <<나도 덜 죽으면 내가 살아서 신앙생활할수있습니다.>> 내가 주의 열심으로 하고, 내가 교회에 왔고, 내가 나와주었고, 내가 리더자가될때, 내가 하는 모든것은 정당한데 다른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지못하게여기게됩니다. 그 모든 신앙의 열심은 다 내가 한것 뿐일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 사는 것이라" 이것이 바로 내가 사는이유이요, 내가 교회안에서 사역하는 이유이고, 내가 교회다니는 이유이고, 내가 예배하는 이유가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덜 죽으면 내가 살아 향방없는 닭처럼 달릴것이니다. 고난주간을 마지막날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보면서 우리도 완전히 죽어지는 토요일이 됩시다.
2. 두번째 말씀의 교훈은 두명의 인물 설교입니다.
한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이고, 한사람은 니고데모입니다.
첫째, 아리마대 요셉은 성경에서 등장하지 않다가 오늘 처음등장합니다. 어디 숨어있다가 오늘에서야 등장하면서 예수님의 장례를 주도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숨어 있던 제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은휘하였다는 말씀을 보면 그의 소심한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있습니다. 그는 그는 산헤드린공회의 공회원이었습니다. (마27, 막15, 눅23 장에서는 선한자, 의로운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자라고 소개합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느때에 이렇게 소심씨(소심한사람)가 용맹스런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빌라도의 무책임하고 야비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바뀌지 않았던가 생각해보게되었습니다.
둘째 인물은 니고데모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예수님보다 나이도 많고 율법학자였습니다. 공회원과 관련하여 일하는 유대관원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문제를 안고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온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기때문에 밤중에 몰래 왔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는것 조차 부끄러워하던 두번째 소심씨를 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대화중에 거듭남에대하여 깨달음을 어느정도는 얻게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요한복음 7장에보면 예수님을 정죄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변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19장에서 드디어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치루는데 엄청난 물질을 제공했습니다.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 100근정도 드렸습니다.
이 두분의 모습의 공통점은 성격이 소심했다는 것입니다.
쟝폴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소심한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기전에 무서워하고,
"바보같은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고있는동안에 무서워하고,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나가야 무서워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보면 소심한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는 얼마나 소심한지 하나님앞에 5번이나 나는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다고 내가 애굽왕에게가봤자 그는 나를 무시할것이고 내말도 들어주지도 않을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안될것같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생각하면 그드온의 300명 용사하고 생각해서 그가 대단하게 용감하고 용기있는 사람인줄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미디안이라는 대적들이 무서워 포도주 틀에서 타작까불었던 사람입니다. 그릇이 틀그릇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을 대적에게서 구원자로 내가 너를 쓰겠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왜 저이냐(정확하게는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을 시험할때에 하나님은 염소제물위에 불을 내리셨고, 양털과 땅에 각각 다른날 다른 방법으로 이슬을 내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소심한 자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우리는 성격 탓하며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할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만을 바라보면서 안된다고 말하던 소심씨가 우리속에도 존재합니다. 오늘 '큰 용사여,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하시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면 성격을 초월하여, 어떤 핑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쓰시는 강력한 병기가 될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시체를 보면서, 인생의 큰 두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성격을 뛰어넘어, 핑계를 뛰어넘어 올바르게 쓰임받게됩니다. 성격이 나올때 아차, 내가 하나님과 멀어졌구나 생각하시며 그분안에 붙잡히 강력한 병기들이 되세요!
<기도>그러므로 우리는 성격-성질-성향대로 믿지말고, 성경대로 믿기를 기도하십시오! 내가 죽어야한다는 진리를 예수그리스 십자가안에서 바로 깨달아서 한알의 밀알처럼 죽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기도와 여러분의 믿음이 반드시 하나님의 안에서 부활의 영광의 날이 오게될것입니다.
-고난 주간, 주님의 고난을 끝까지 동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