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응답] 나사로야 나오라
본문
요11장43-44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5-02-23

요11:43-44 "나사로야, 나오라!" 

John 11:43-44 “Lazarus, come out!”


인생에서 우리는 때때로 깊은 절망과 무력감 속에 빠집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적으로 죽은 것 같은 상태, 어떤 이들은 교회와 멀어진 상태,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내 인생의 무덤’에 묻힌채 살아가는 상태와 방불한 것입니다.


John Mark Comer의 「슬로우 영성 The ruthless elimination of hurry」 이란 책에 보면, 존 마크의 사역이 얼마나 바쁜 사역이었고 그 바쁜 사역 때문에 외형적인 성공을 이루어 한 해에 천명씩 성도들이 늘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주일에는 예배가 6번 있었는데 1번의 예배가 더 창설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형교회 목사님께 전화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그 모든 예배를 감당하십니까?” 물었더니, 그가 왈 “달리기를 하듯 계속 달리면 된다”는 말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후 얼마후에 달리기를 하듯 목회했던 그 목사님은 불륜으로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눈을 감았는데 잠이 오지 않아 쿵푸 영화를 틀어 놓았는데,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 뱉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상태를 보니, “반은 살아있고, 받은 죽은 상태다! 무감각한 상태다! 맥 빠지 상태다! 깊이 생각할 수 없고 시야가 좁은 상태다! 감정적으로는 삶의 밑바닥에서 생기는 불안과 슬픔의 물줄기가 흐로고 있는 상태”라고 자신의 영적 공허함을 고백했습니다. 7년간 바빠서 앉아 쉴 시간도 없이 달려온 길에 “이것이 예수님의 길인가?” 되물었고, 그때 그는 잠시 멈춰 숨을 깊이 들이쉬고, 40세, 50세, 60세의 자신을 돌아보니 번지르르하게 생긴 “성공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교회를 떠났고, 본인은 늙었고, 스트레스로 성격이 예민해 무슨 말을 들어도 예민하게 쏘아붙이고 있고, 얼굴에는 불행으로 가득찬 표정으로 서 있는 한 남자가 눈 앞에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후 그는 그 시점을 계기로 예수님의 느린삶 slow living 을 본받아 삶의 속도를 늦추고, 삶을 단순화시키며, 예수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결정과 훈련과정을 통하여 “이제는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며, 더 온전한 모습으로 자라가고, 하나님을 다시 느끼게 되었고, 자신의 영혼이 비포장 도로일지라도 멋진 지평선을 향해가는 자신을 보면서 미소를 짓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비단 영혼의 무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는 생물학적 죽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내시고 그는 반응하고 거기 모인 공동체는 그가 자유하도록 풀어놓아주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교회도 도전받고자 합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 예수님의 강력한 부르심: 43절)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43절에 보면,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소리는 죽음의 권세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부르심이였습니다. /원어에서는 κράζω (크라조) 곧, 큰 소리로 외치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강한 명령과 절규하며 부르짖음입니다. 단순한 속삭임도 아니고, 설득하기 위한 논리적 어휘도 아니었습니다. 죽음과 무덤을 뚫고 나올 정도로 강력한 명령과 절규였고, 그 부르심속에 그 누구도 감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강력한 권위가 동반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본문은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인생을 살려내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을 때에도 불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될 때에도, 예수님의 강한 음성은 우리의 무덤을 깨우십니다. 혹, John Mark Comer목사님이 경험했던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는 상태”였던 그의 영혼일지라도, 그를 향하여 하나님의 강한 음성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를 인생의 무덤 앞에서 불러내시는 큰 소리였습니다. 그 누구인들 그 소리에 깨어나지 못할 영혼있겠습니까! 


2020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롬비아 대학(UBC) 연구팀이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청각 반응을 깊이 조사했습니다. 건강한 성인과 말기 환자로 나누어 뇌파검사를 하면서 임종을 지켜봤더니 의식을 잃었던 말기 환자들도 외부 소리에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의식 상태에서도 외부 소리에 반응했을 뿐 아니라, 사망통보후에도 10분 동안 뇌에서 느리지만 델타파가 지속적으로 감지된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임종을 앞둔 환자, 의식이 흐리거나 없다고 판단되어도 그들곁에서 “사랑해요, 감사해요, 편히가세요”라는 말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줄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자에게 큰 의미를 안겨주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살아있으나 죽었습니까? 반만 살았습니까? 비록 살아있어도 산것같지 않으실지라도, 오늘 말씀이 우리를 인생 무덤에서 끄집에 내는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강력한 명령과 절규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왜 죽은 자를 불러내셨습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오래살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하여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산소망을 증거하게 하려고, 너를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심을 받은 것은 나 잘먹고 나 잘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세상을 향하여 산소망을 증거하게하려하심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나사로의 반응입니다: 움직이는 믿음이었습니다(44a).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나사로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걸어 나오는 행동은 로보트가 명령에 의하여 걸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면 잘못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수족을 동인채로 나오는 것은 그가 살아나서 능동적으로 걸어나왔다는 뜻이지, 강시가 관뚜껑이 열리면서 튀려나오는 것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의 생각은 무작정 걸어나왔다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명령이기 때문에, 그 죽은 영혼이 무작정 벌떡 일어나 나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시 분석하고 묵상하며 (시간을 두고) 또 다시 살펴보면서, 나사로의 반응은 죽은 물체가 걸어나온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생명있는 살아있는 인격체로 걸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그는 무덤속에서 다시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감각을 가지게 되었고, 상황을 파악하며 문밖으로 걸어나오는데, 그 반응이 능동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움직이는 믿음이 진짜 믿음 곧 산 믿음입니다.


그런 일을 누가 하셨습니까? 그 스스로가 했습니까! 죽음의 무덤에서 밖에서 소리가 들렸을 때 그의 죽어 썩어 시체 냄새가 풍기던 그의 육체속에 모든 감각기능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때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감격과 그 느낌과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인간의 말로는 다 설명해 낼 수 없는 신비가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때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광경을 묵상하면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생명의 주관자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할 따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아멘”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지고, “부르심의 소명”도 살아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자멸하여 사라지지 않게하시려고 다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무덤안에서 나는 내 모든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큐티를 하면서 한주간을 보내는 과정속에 요14:14절 말씀을 삶속에서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그 하루는 정말 예수님의 이름에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고 엄청 찬양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그가 주신 능력으로 그가 주신 능력으로 그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이제는 제한적 기도를 무엇이든지 기도하게 되었고, 그 기도의 시행은 예수님께서 시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앞에 내가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3. 공동체의 역할입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b).


나사로는 해방되었습니다. 죽음과 흑암의 올무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향하여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그를 다시 묶지말라. 이제는 안묶어도 된다. 그는 살아났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가 되었으니, 그가 무엇을 하던지 다닐 수 있도록 풀어주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뜻은 그를 묶었던 베만 풀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풀어주는 역할로 그를 도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공동체에서 이루어져야할 역할이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감시하고, 꽁꽁묶고, 통제하고, 억압하고,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풀어주는 사역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방임해버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안에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신비한 것을 체험했고, 그것이 자신의 남은 삶속에 어떻게 작용되고, 자신의 생명을 살려주시고 산소망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안에서 자유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교회 공동체의 역할은 그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네가 할 수 없어”가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도록 도와줄께”라고 말하며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라.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말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않는 이런 시대속에, 예수님은 강한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것이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그리곻 교회공동체는 서로를 풀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교회가 더 모이기에 힘쓰고(히 10:25), 맡겨진 역할에 헌신하며(롬 12:6-8), 서로의 부르심에 대한 존중과 돕는 마음으로 하나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우리 인생의 무덤에서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즉각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 교회가 깨어나고, 모이기에 힘쓰며, 각자가 맡은 바 소명을 다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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