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14:16–17 The Promise of the Helper, the Holy Spirit"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지난주간에 화요일 큐티를 하면서 “이레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입니다. 그중에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동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보호하셨던 때를 기억하며 그때처럼 초막을 짓고 7일간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이 광야 같은 세상속에서도 여전히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지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ㅡ 그 말씀을 통하여 내 인생의 초막절을 기억하면서 제가 어렸을 때 산에 기어오르다가 떨어져 죽을뻔한 생각에 아찔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비온 후 물이 불은 강에 들어갔다가 떠내려 갈뻔 했다가 죽을뻔했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문둥이 촌에서도 거절당하고 돌아와 이불 덮어쓰고 울때에도 하나님은 위로해 주셨습니다. 미국와서 차사고 두번이나 크게나서 죽을 고비에서도 하나님은 살려주셨습니다. 이런 육신적인 죽음외에도 영혼의 낙심을 경험하는 고비에서도 하나님은 살려주셨습니다. ㅡ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여러모양으로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고비를 경험하지만 하나님은 그때 그때마다 철저하게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다는 것을 믿게하셨습니다.
‘초막’이란 단어를 찾아봤습니다. “덮다, 가리다, 감싸다, 보호하다”는 어원의 말씀이었습니다.
옛날 어머니의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찬바람이 불면, 어머니는 조용히 마당 한쪽을 향하셨습니다. 손에는 절인 배추, 양념은 맑고 하얗게 만드셔서 —무, 배, 생강, 대추로 속을 곱게 채운 백김치를 큼직한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으시고, 땅에다 묻으셨습니다. 허리춤 깊이, 조심조심. 항아리를 묻고, 짚 가마니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으며 말씀하셨다. “겨울 준비는 이걸로 됐다.” 밤이 깊은 어느 날, 고구마가 익어갈 때면 어머니는 조용히 나가 가마니를 걷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하얀 김치, 살얼음, 그리고 시원한 맛. 고구마 한입, 백김치 한입. 겨울밤의 맛은 항상 어머니 손끝에서 나왔습니다.
ㅡ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매서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담그시며 익어가게 하십니다. 어머니의 손길처럼 우리 인생이 맛들어 질때까지 덮어주시고, 가려주시고, 감싸주시고, 보호하시며 기다려 주십니다. 그때 우리 인생의 어떤 순간엔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고독을 경험합니다.
ㅡ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리라”고 하셨을 때,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예수님은 하늘의 가장 위대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의 약속이었습니다.
ㅡ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 믿음안에서 주신 “보혜사 성령의 약속”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떻게 이 약속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또 다른 보혜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6)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신다고 하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불안해했고, 그런 마음을 모르실리가 없으셨던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제자들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서 보도 듣도 알도 못한 무지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눈으로만 보았던 예수님의 실체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그들입장에서는) 새로운 존재 곧 보혜사 성령을 수용하기도 또 이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역사를 하시며 어떻게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일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또 다른(ἄλλον/allon)”이란 말은 외적으로는 다르다는 의미도 있지만, 질적으로는 동일한 분이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과 또 다른 분 곧 보혜사 성령님이 예수님의 사역들을 대체 가능할 수 있는 분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 가능하냐 안 하냐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완성하신 십자가 구원사역에 어떻게 적용하시며 우리들 가슴에 믿어지게 하느냐는 사역으로 연속선상에서 성령의 사역을 보는 것이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보혜사(παράκλητον/Paraklēton)”라는 말은 “곁에서 돕는 자, 곁에 부름받은자, 끌어안으시는 자, 변호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or), 대언자(Advocate), 돕는 자(Helper)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은 예수님의 떠난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지혜로써 지금도 우리 곁에서 위로자요, 상담자요, 대언자요, 돕는 자로서 역할로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은 오늘날! 지금! 여러분곁에서! 적용하시고, 위로하시고, 상담하시고, 대언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의 손 아랫 동생정도로 봐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군가의 꼬봉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어떤 보여지는 능력이나, 힘, 감정과 지식과 환경을 변화시키심에만 치우쳐 있으신 분도 아니십니다. 성령님은 오히려 그것들을 사용하실 뿐 아니라, 그것들을 뛰어 넘어서 우리가 천국감에 반드시 가져가야 할 믿음을 믿음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동행하듯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역동적인 생명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24장속)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인생의 딜레마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은 진리, 하나님의 아들, 능하신 선지자라고 하셨는데 그는 세상에서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눅24:19-20절에보면 ㅡ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그가 부활했다고 하네?ㅡ 아무리 생각해봐도 깨닫지 못하고 고민할 때, 예수님께서 부활의 모습으로 오셔서 성경으로 이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감춰져있던 비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눈이 열리지 않아서 그 말씀이 보여지지 않았고, 들려지지 않았고, 깨달아 지지 않았는데, 그가 말씀하시고 떠난후에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해도 예수님이 말씀전하시고 떠난 자리에 진리는 살아 눈을 열어 보게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제자들은 진리를 몰랐습니다. 진리를 알지못하니 진리의 영도 또한 알지못했습니다.
본문에서 “진리(ἀλήθεια/truth)”라고 말할 때 그 진리는 “숨겨지지 않은 진실” 즉,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계시된 진리는 성경에서 약속하신 말씀이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되어 우리가운데 임하신 성자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에게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요1:14). 다시 말해, 제자들은 진리도 알지못해었고, 진리의 영도, 진리의 영이 하시는 사역도 알지 못해었습니다.
“진리의 영”에서 그 ”영(πνεῦμα/ Spirit:)”이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바람, 숨(호흡)이라는 뜻이지만, 그런 자연적인 현상으로서만 설명하기는 너무나 부족한 단어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 단어가 적용된 사건들을 보면 좀더 알 수있습니다. 창1:2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속에 있던 지구촌을 순찰하셨던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의 활동사건 이라든지; 창2:7절에서 흙으로 만드신 사람에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는 사건장면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며, 영으로 활동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사건으로 역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계시해주시고,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믿음을 주시고, 세상속에서 진리를 분별하게 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셔서 우리 영혼을 케어하시고, 세상속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는 분이 곧, 진리의 영 곧 성령하시님의 활동사건들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도/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진리의 영으로 찾아오셔서 나를 진리로 이끌어주시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에서 성령의 생각으로, 육체의 안락함보다 성령의 기쁨을 위해서 나를 붙잡아주시는 것을 매순간 경험했을 것입니다. 저는 기도… “하나님 저를 붙잡아 하나님 위하여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쓰시려고 지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저를 부르셨고 또 다시 진리로 이끌어 주심에 또 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3.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7下)
본문을 다시보면 “저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전자는 외적동행(外的同行/External Companionship)을 약속하신 말씀이었고, 후자는 내적내주(內的內住/Internal Indwelling)을 약속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은 3년간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지냈던 모든 시간들은 모두가 달콤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떠나가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떠나 가는 사람도 마음이 무겁고, 보내주는 사람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오늘 읽지 않았지만 본문 뒷 구절 1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벼려두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을 예수님께서 쓰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도 힘들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참 정이 많이 들었기는 들었구나! 예수님도 별수없는 인간애에 힘들어하셨구나!... 그리고 본문 앞구절들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제자들의 홀로 버려둠을 당하는 불안한 심경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안할수록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의지해야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신 말씀으로 5가지로 약속하셨으니: (1)영원토록 함께하셌다ㅡ (2)진리로 인도하겠다ㅡ (3)세상을 능력있게 살게 하겠다ㅡ (4)너희가 그를 알고 믿고 따르게 할것이다ㅡ (5) 외적동행과 내적내주로 홀로두지 않겠다고 성령안에서 약속하신 말씀이셨습니다.
다시 본문16-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결론
“보혜사 성령의 약속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성령을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곁에 계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혼자가 아닙니다.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지금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함께 하시며, 진리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의 약속”을 믿고, 그분을 환영하고,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성령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로 오셔서 오늘도 저희 곁에, 그리고 저희 마음 안에 함께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저희는 성령님을 압니다. /진리의 길로 저희를 인도하시고,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게 해주세요. /저희의 삶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걸음이 되게 하시고,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을 모시며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