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십자가의 고통속에 담긴 사랑
본문
마27장45-50
설교자
김성훈목사
분류
날짜
2025-04-13


마27:45-50 십자가의 고통속에 담긴 사랑

Matthew 27:45–50 “Love Revealed in the Pain of the Cross”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명절에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하셨을 때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떡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서 감사드렸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눔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의 몸을 떼어 나눔하는 것은 찢기고 부서지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난 더 이상 상처에 속지 않는다』의 저자 ‘앤 보스캠프(Ann Voskamp)’는 ‘부서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쁜 부서짐은 그리스도의 좋은 부서짐으로 치유된다. 하나님은 크게 상처받은 자들을 통해 큰 일을 행하신다. 부서진 자들을 최고로 여기시며, 그들 안에서 최고의 것을 발견하신다.”; “변화 없이 성장 없고, 순복 없이 변화 없으며, 상처 없이 순복 없고, 부서짐 없이 풍성함도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서짐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과 상처를 안고 기꺼이 부서지셨습니다. 그 부서짐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의 악한 자아를 부수시며, 부서짐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내시고, 부서짐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떡을 떼다’는 말은 단순한 행위가 아닙니다. (1) ‘손으로 떡을 찢어낸다’는 뜻입니다. → 찢겨 나감의 고통이 반드시 동반됩니다. (2) ‘그 찢긴 떡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 고통을 나눔으로 생명을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룹니다. (3) 그리고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 육신의 떡은 육신의 생명을 살리지만, 예수님의 떡은 영원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 주일입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 담긴 사랑”이라는 말씀을 통해 찢기신 예수님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고, 그 떡을 함께 먹으며, 생명을 누리는 은혜의 자리에 이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시작되었으면 좋겠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참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어둠 속에서 드러난 사랑 (45)


45절,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6시는 유대시간 기준으로 낮 12시(정오)이고, 제9시는 오후 3시입니다. 낮12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제일 밝아야할 시간이었는데 제일 어두운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날씨가 갑자기 변화되었거나, 일식(Solar Eclipse)으로 해가 가려졌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어둠은 단순히 자연현상으로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등장시킨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 이유를 찾아가고, 성경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합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했습니다.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ㅡ첫째. 왜 가장 밝아야 할 시간(오정12~3시)에 어둠이 임했을까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어둠이 단지 시각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것일까 궁금했습니다. 셋째.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은 제한적인지 세계적인지 우주적인지 과연 어디까지를 내포하는 하는가입니다. 넷째. 어둠이 십자가와 무슨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ㅡ의 질문들이었습니다.


묵상) 정오는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밝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뒤죽박죽 뒤섞이는 초자연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대낮에 펼쳐지는 자연의 질서가 이렇게 뒤흔들릴 만큼 중요했던 특별한 일이 무엇이었겠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석을 찾아보고, 성경의 사례들을 생각하면서 결국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하나님의 시간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저주를 그리스도 십자가로 몰고 오셨던 사건이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진노에 따라 집행되고 있었고, 인류와 세계의 모든 죄란 죄들을 모조리 끄집고와서 그리스도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 생각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려는지 그때 가슴이 뛰기 시작했었습니다!


성경속에는 “흑암”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애굽에 내린 9번째 재앙이 흑암재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둠으로 애굽을 덮어버리니깐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곧, 애굽인들 모두가 자기 처소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 앞에 섰을 때 백성은 건널 수 없어 원망하는데 뒤에서는 또 애굽 군대가 죽이려고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애굽 군대 진영에 흑암으로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깐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했습니다.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그들은 전혀 분간이 안되어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이런 말씀을 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대낮에 해를 지게하며,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라고하면서 그 어둠을 일컬어 “애통, 애곡,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자기 백성일지라도 범죄한 백성들에게 어둠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신 사건들이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질문들에대한 답변들을 나름대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1/ 그렇다면 왜 가장 밝아야할 시간에 어둠이 임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때문이었습니다. 2/ 이 어둠이 시각적이기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영적이고 예언적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3/ 이것이 비록 골고다 십자가 언덕위에 있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어둠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온 인류와 창조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그리고 어둠이 십자가와의 관계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죄로 말미암은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참예함으로 모든 고통을 그에게 담당시키기위함이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은후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의 욕심이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나의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나의 육신의 정욕과 거짓과 악한 모든 생각들과 상한 심령과 연약함 모두를 그리스도 십자가 밑에 내려놓습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주의 은총을 입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의 어둠을 함께 담당하실 것이라는 확신과 내가 세상속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이제 나의 삶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방향을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둠의 머무르는 자녀가 아니라,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이요 소금이이라는 소망이 생기게 된것이었습니다.


2. 버림받음 속에 나타난 사랑 (46)


46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그보다 영혼의 고통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통, 정신적으로 당하는 고통도 마음속에 깊이 남아 사람을 오래동안 괴롭힙니다. 그러나 영혼의 고통은 병원에 가도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없어, 오직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신학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십자가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고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 즉 철저한 버려짐의 고통이었다”고 했습니다. 고통중 가장 깊은 고통은 육체도 아니고, 정신도 아닙니다. 진짜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영혼의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죽어서 끝나지 않기때문입니다.


시편22편의 저작자 다윗도 극한 고난속에서 영혼의 단절을 경험한바 있습니다. 시22:1절, “내 하나님이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나 다윗은 후반부로 가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회복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시22:24-26절,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이와같이 다윗은 처절한 버림을 받는 고통에서도 끝까지 그가 믿은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듣기 싫다며 고개를 돌리시지 않는 하나님으로 끝까지 믿고, 숨김없이 부르짖으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결국에는 들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숨겨진 사랑이고, 우리가 고난의 먹구름 때문에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은 택한 자녀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며, 반드시 찬송하게 말들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만큼 철저하게 버림받은 자가 또 어딨겠습니까? 그날도, 요셉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 심부름을 갔습니다. 형들에게 도시락을 전해주고, 안부를 묻고 돌아오려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말과 눈빛이 자신을 덮쳤습니다. “저놈이 오는구나. 꿈꾸는 자가 오는구나. 죽여버리자.” 요셉은 사랑받는 아들이었지만, 그 순간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팔과 다리가 묶인 채 깊은 구덩이에 던져질 때, 요셉은 하늘을 올려다봤을 것입니다. 빛도 들지 않는 그 깊은 땅속에서, 그는 아마도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은 아무 해명도 듣지 못한 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오해받고, 잊혀지고, 철저히 외면당한 삶을 걷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버림받음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요셉은 고백합니다: “형님들, 두려워 마세요.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50:20) 요셉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던 그 시간, 하나님은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의 계획을 짜고 계셨다는 것을. 그 구덩이는 형제의 증오가 만든 구덩이였지만, 그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으십니까? 해석되지 않는 고통, 깊은 어둠의 시간에 계십니까? 요셉처럼 말없이 당하고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침묵 속에서도 사랑을 준비하고 계시며, 버림받음은 끝이 아니라, 사랑이 드러나는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을.


다윗의 절규, 요셉의 절규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절규 앞에 다시 서야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절규는 단순한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인생의 버림받음 속에 함께 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버림받으심으로, 우리가 결코 버림받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깊은 영혼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붙드신다는 언약의 확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합니다. 때로는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그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의 길, 사랑의 뜻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3. 마지막 숨결 속에 완성된 사랑 (50)


마27:47-50.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주위 사람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집중하시기보다 끝까지 자신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리고 계셨습니다. 특히50절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50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단순히 예수님이 큰 소리지르실 때 영혼이 빠져나가셨다라고 이해될 수 있겠지만, 원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 영혼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셨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몸이 자기 기능이 다하여 영혼이 연기처럼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자발적 의지로 떠나보내셨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죽음처럼 죽을 수밖에 없어서 죽은 [수동적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자발적으로 내어주신 [능동적 죽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죽어야하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모조리 내어주신 것이란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아낌없이 다 드려도 아깝지 않는 죽음,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고 하셨는데 무슨 큰소리를 지르신 것입니까? 가상칠언의 6번째 혹은 7번째였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6번째는 “다 이루었다”, 7번째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인데 둘중에 한가지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저의 묵상으로는 후자쪽이 더 맘에 끌렸던 것은 영혼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을 치시면서 자신의 영혼의 모든 진액을 다 드리시고 계시다는 생각이 압도했기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칼빈도 후자를 택하였고 이런 기도문으로 해석해주었는데, (들어보세요)“아버지여, 모든 입이 나는 멸망을 받기로 되어 있다고 떠들어 대고 있으며, 나의 영혼은 이리저리 끌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당신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나의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며, 당신의 선하심이 베푸는 숨은 보호를 받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주변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많아도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위임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숨은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까지 하셨던 [예수님의 영혼관리법]이었다고 생각하니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주변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많아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죽음에서도 하나님의 숨은 보호하심으로 지켜주심을 믿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엘리야가 오나 보자”며 조롱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쏟아질 때도 그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숨결은 억지로 내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짊어진 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의 숨결이었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그리고 기쁨으로 그 십자가를 끝까지 지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각자 십자가를 만들고 목적지까지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한 제자는 커다란 십자가를 정성껏 만들고, 다른 제자는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골라 들었습니다. 여정이 끝나갈 무렵, 큰 십자가를 만든 제자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는 지친 기색 없이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왔습니다. 반면, 작은 십자가를 든 제자는 한참 뒤에 힘들어 죽을 듯한 얼굴로 겨우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온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큰 십자가를 지고도 기뻐할 수 있었느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 길 내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에 기뻤습니다.” 그리고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든 제자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너는 왜 이렇게 힘든 얼굴을 하고 있느냐?” 그는 고개를 숙이며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제 방식대로 가면 덜 힘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외로웠고, 기쁨은 없었습니다. 작은 십자가였지만, 저 혼자 지느라 더 무거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크기는 고난의 외형이 아니라, 그 길을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지는 십자가는 기쁨의 십자가가 되고,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숨결은 우리를 위한 승리의 선포였고, 그 숨결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그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기도

주님, 찢기신 십자가의 사랑 앞에 제 삶도 기꺼이 드리오니,

주님과 동행하는 십자가의 길을 담대히 걷는 고난주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번 고난주간 특별기도회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있사오니,

저희 모두 기도로 동참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고난에 깊이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경험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로 구원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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