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Matthew 1:21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마태복음의 시작은 족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족보는 끝이 납니다. 이 족보이야기가 신약성경의 서두에 자리 잡을 만큼 중요했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정체성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 조상이 누구며 그 조상으로부터 흘러내려온 후손이라는 것은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선한백성이라는 증거였기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구약에 약속하신 메시야가 신약에 성취하신 예수셨다는 메시야 사상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평생을 남의 밑에서 억압당하던 민족이었기에 이제는 다윗왕때 누렸던 잠깐의 태평성대를 메시야가 오신다면 영원한 천국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예수가 메시야이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리고 족보이야기가 증거된후 바로 나오는 이야기가 ㅡ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 그가 구약 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야 이시니, 너는 정혼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아 기르고, 그 이름을 예수라 지어 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하리라”
이사야서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은 고통과 흑암으로 전혀 앞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어둡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흑암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완전히 담당하셨고, 그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의 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는 곳에 고통과 흑암이 새 생명과 빛이 비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소망이십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가정과 민족은 아들을 낳는 것에 대한 의미가 특별합니다. 1) 유대인들에게 아들의 중요성은 아무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아들은 유대인의 가문을 이어가는 통로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딸 보다 아들을 중요시했습니다. 그것은 혈육적인 의미를 떠나 신앙적인 의미도 있었습니다. 창세기12:3절의 말씀처럼 “너의 후손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기 위해서 아들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2) 한국 사회에도 집안의 혈통을 이어가기위해 아들이 필요했고, 재산을 상속하더래도 아들들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주었고, 노후에 아들이 자신을 끝까지 지켜줄 것 같은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아들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현대에는 부모 봉양이 아들만의 책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딸들이 오히려 부모님을 더 잘 부양하는 증가 추세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들을 낳으리니”는 그런 이 땅의 혈통과 계보와 안정적인 도움을 위해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계획하는 것 너머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이 있고 그 계획속에 아들을 보낼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이유를 이미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이름속에는 이름에 대한 존재의 의미와 사역의 역할과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종말 마지막 날에 내가 받을 분명한 상급을 “예수”라는 이름 하나로 알 수 있게 하셨기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Yehoshua)이며 여호와(YHWH): 하나님+ 슈아(shua): 구원이 합성=여호수아), 아람어 예수아(Yeshua), 헬라어 예수스 (Iēsous)로 불리면서 라틴어와 현대언어에서 예수(Jesus)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주는 영적 의미는 단순한 이름 정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와 고통과 죽음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게 되기때문입니다. “예수!”
지난 주간 큐티를 하면서 ”이름”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았습니다. 계시록19장11-16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지막 공의의 심판 전쟁,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속에 심판의 주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보게 되었습니다. 1) 그 이름은 충신과 진리라는 이름이었고, 2) 그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이었고, 3)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4) 그 이름이 그분의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그 이름이 구원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입은 옷에는 그분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치 있는 것은 내가 누구로 말미암아 태어났고, 누구로 말미암아 살며, 누구 때문에 승리하며, 누구때문에 천국가게 되었는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오시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었다고 한 것입니다. 로마서5:8절에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함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 대한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던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이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이라는 것은
1)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대상이 자기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나의 백성”이라고 불렸고, 신약성경에서는 혈통을 뛰어넘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 자기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의 친밀성과 소유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관계성에서 오는 친밀성과 소속감이 없이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처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자기 백성”이란 말씀속에 들어 있어 분명한 정체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3) 자기 백성이라는 말씀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서 출발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과 지혜와 마음에서부터 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4)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하셨기때문입니다.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렇게 분명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탄생하셔야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죄와 타락과 불순종 이후 그의 이후로 탄생되는 모든 인류가 맞이해야 할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나면 아픔과 고통과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무리 벗어 날래야 벗어 날 수 없고, 젊어 질래야 젊어질 수 없고, 되돌아 가고 싶어도 되돌아 갈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야말로 죄의 늪에 빠져 잠깐 살아가는 인생, 그 말씀이 바로 “그들의 죄에서”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평소 새벽기도 마치고 예인이를 학교까지 롸이드 해줍니다. 어느날에도 평소와 같이 집에서 출발하여 웨스턴 에빈뉴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하이웨이 240의 교차지점에서 멈춰 섰습니다. 수많은 새떼들이 무리를 지어 전선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식당들이 있었기에 무엇을 먹으려고 도로위에 죽은 동물의 시체와 먹다 버린 음식물을 뜯어먹으려고 위험을 감수하고 도로로 내려 앉았습니다. 떨어진 음식물은 보이는 대로 주워먹으려고 음식점 주변으로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하루 묵상하면서 그 때를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속에서 내가 어느 지점에서 생을 마감할지 모르지만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게 되었을 때 “내 인생의 말로는 새 떼들의 간식거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심판의 진치가 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혼인 잔치의 축제가 되게하소서! 예수님이 신랑되시고 나는 그의 신부되게 하소서! 계19:21근거로 묵상한 하루가 되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2천년전,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자신의 죽으심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일 곧 12월25일 성탄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의 이유에는 관심이 없고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그가 주는 선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좀더 성숙한 성탄절을 보내기위해서는 1) 성탄절까지 성탄절에 관련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2)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한 예수님처럼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좋습니다. 3) 가족과 함께 성탄의 찬양을 불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성탄절을 육체의 쾌락으로 삼기보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실천하려는 결단을 가진다면 이전보다 더 성숙한 성탄주간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
우리를 사랑하사 이 땅에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성탄주일을 맞아 우리의 한 주간의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을 보일 수 있는 성탄절을 보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우리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모든 죄와 고통과 죽음의 흑암에서 벗어나게 되는 성탄의 빛을 비춰주시며, 성탄 말씀 묵상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성탄의 찬양이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탄생하신 우리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