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9:1-41, The Living God Who Still Works Today"
마15장29-31절에보면,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병든 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병을 고침받으려고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다 고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질병의 문제를 어떡하든 해결 받은 경우를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아람 장군 나아만은 문둥병에서 치료함을 받았고, 유다 왕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받고 생명을 연장받게 되었습니다. 그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치료받은 사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도 오늘 본문의 소경이 고침받고, 나병에서 고침받고, 중풍병에서 고침받고, 혈루증에서 고침받는 사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친히 고치시기도하시며, 그 누군가를 통하여 고치시며, 기타 여러가지 방법으로 고치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때문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정말 혈기왕성한 삶을 살으셨지만, /중풍병에 걸리니깐 손발이 마비되고, 말이 나오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대소변도 볼수없으셨습니다. /그 이전의 삶은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오셨고, 제가 목사님과 교육전도사님을 모시고 전도하려고 했었지만, 자신의 주먹을 믿지 예수는 안믿는다고 문을 ‘꽝’ 닫어버리셨던 강직한 아버지셨습니다. 그렇지만 중풍에 걸려버리니깐, 살아보려고 그렇게 무단히도 노력하셨어도 결국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저와 함께 기도원에 가서 한달을 기도하기까지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결국 못고치고 내려와야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주일이 지난후에 안방에서 “어 어 어 어” 큰 소리가 나서 뛰어가 보니깐 혼자 일어서서 걸어다니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기뻐 함께 손잡고 찬양했습니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었네!” 그후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오전오후예배... 예배생활에 철저하게 다나며 움직이셨습니다. 처음에는 걸어다니는 정도였지만 차츰차츰 좋아지면서 자전거를 타셨고, 기도를 하면서 말이 트였습니다. 100% 회복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천프로, 만프로의 회복보다 더 좋은 회복을 얻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만났기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앞못보는 소경의 이야기는 매우 소중한 이야기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9장, 한 장전체나 할애할 만큼 이 이야기만 중점으로 다뤄지고 있기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 소경을 통하여 어떤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몇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움직임 (1-7): 하나님은 소경을 말씀에 따라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때문입니까 자기죄 아니면 그 부모죄때문입니까?” 이 질문의 배경속에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자를 마치 “죄인취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제자들이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이미 모든 유대인들의 생활속에 장애자는 죄떄문이라는 생각이 사회속에 만연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아도 잘 알지못함때문이고, 율법을 주워들어도 잘못 이해했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해석은 항상 극단적인 질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질병이 걸렸으면 어떤 질병이든지 그것은 그 사람속에 죄가 있었기때문이며, 아니면 부모의 죄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용) 오늘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이 질병에 걸렸을 때 혹은 원치 않는 일을 당했을 때 “거봐! 내 말 안들어서 그렇게 됐어!”, “거봐! 교회빠지니깐 그렇게 됐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꾸 죄와 연관만 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죄로 말미암아 질병을 받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어도 멀쩡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죄를 안지어도 욥처럼 악창이 걸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둘 중에 취사선택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들에게 그리고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일하실 계획’이 있으셔서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질병을 통하여 자신과 타인과 상황을 돌아보며 무슨 죄가 없는지 성찰하는 것은 매우 좋은 태도라고 볼 수 있지만, 지나친 성찰은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성을 느낄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나냐, 너냐’에서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다면, 하나님 안에서 어떤 계획과 역사를 일으키실지 기대하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소경 같은 자를 통하여 어떤 기적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지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오늘도 예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계십니다! 그것은 마치 내 인생이 소경의 인생처럼 살아왔었어도, 예수님을 만나 새 하루를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소경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주목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여겨 눈에 발라주시며, 내게 지시하시는 실로암못으로 가하실 때 소경은 움직여야 했습니다. 앞도 못보는 자가 어떻게 움질 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를 돕는 손길이 있었거나, 그가 도움을 구하며 찾아갔거나, 아니면 평소에 그는 익히 그 실로암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곳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며 갔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강한 끌림속에 그는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었더 밝은 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적용) 저의 아버지께서 질병에서 조금씩 극복하며 다시 움직이며 일어서는 순간마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것은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손을 다시 펼수 있고, 말을 할 수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곧, 당연한 것이라고만 생각한 것이었는데, 그 움직임 하나 하나가 성취될때마다 얼마나 기쁨인지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움직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 발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으로 걸어가게 하시고, 입술을 움직이며 기도하게 하시고, 눈을 움직이며 성경을 보게하셨습니다. 어느날 새벽에는 “주여”하면서 굳어가는 손을 잡고 잡아당기며, 손에 볼펜을 잡으려고 애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있으면 점점 굳어가니깐 움직이려고 애쓰면서,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손에 잡은 볼펜으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2. 증언 (8-34): 세상의 불신과 의심과 쟁론에 맞서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본문8-34절의 긴 쟁론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긴 쟁론이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3부류의 논쟁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불신과 의심 그리고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8절에 보면,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 두번째는 13절에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세번째는 18절에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라는 속에 나타나는 세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소경되었던 자는 세번의 논쟁속으로 끌려다니며, 심문을 받고, 위협을 받고, 부모님들까지 불려가 증언했어야 했습니다.
첫번째 부류(이웃사람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8“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내가 그로다), 10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예수라는 사람이 눈에 진흙발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해서 씻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12그가 어딨느냐? (알지못합니다).
두번째 부류(바리새인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5”어떻게 보게 되었느냐”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16”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자가 아니라” 17”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선지자니이다)
세번째 부류(유대인들)은 그 부모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19“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이는 우리 아들이고, 소경으로 태어났소. 그러나 지금은 그가 어떻게 보고, 누가 눈뜨게했는지 알지못하오. 그가 장성한 자니 그에게 물어모면 자기 일을 말할것이오), 그들은 또 다시 그를 불러 묻기를 24“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 예수가 죄인인줄 아노라” (그가 죄인인줄 내가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보게되었다는 것이오), 26”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내가 이미 말했어도 당신들은 듣지 아니하고, 어찌 다시 듣고자 하느냐,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합니까), 28“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는지 우리가 알지만,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줄 모르겠다!” (다함께 봉독, 30-33절, 30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적용) 미국와서 뉴욕/캐나다에서 바라보는 나이아가라 폭포는 못가봤지만, 오클라호마에 있는 Little Niagara Falls는 몇번 가보았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동네에서 과속해서 붙잡혔었는데, 판사앞에서 당신의 옳음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내가 표지판을 보지못하고 달려으니 guilty라고 대답할 수밖에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소경되었던 자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를 죄인취급했고, 그를 고쳐준 예수님도 죄인취급했습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증언해도 그들은 도무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사회적 분위기는 불신과 의심과 쟁론으로 끌고 다니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해야합니다. 그것은 오늘 내가 영적 소경이던 연약한 자로 살았을 때, 주님은 나를 주목하셨고, 다시 눈뜨게하셨고, 다시 보게하셨다고 증언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3. 믿음 (35-41):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되 계속 믿게 하셨습니다.
5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계속)” 36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39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4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본문은 예수님의 주목하심으로 시작하여 소경이 눈을 뜨는 멋진 시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논쟁과 심문속에 소경과 부모님들은 끝까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았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출교되어 사회속에서 내어 쫓김을 당하며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 이야기의 커튼이 닫히는 순간 예수님의 등장은 다시 커튼이 열리면서 새 희망의 빛이 이 가정속에 비취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출교 당한 인생속에 내가 마치 희생만당하고, 불이익만 당한다고 생각드는 순간에 예수님은 그 가정을 만날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아멘!)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아멘!)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할 것이며,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할 것이라! (아멘!)
적용) 오늘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느냐? 너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믿느냐? 그 일을 위하여 지금 내가 일하고 있음을 믿느냐? 결코 네게 손해나, 불이익이 아닌 영원한 빛으로 인도하기위함이라는 것을 네가 믿느냐?
결론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입술이 세상 것들 때문에 굳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입술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속에 우리를 현혹하는 소리들로부터 끝까지 예수를 바라보며 날 구원하신 주님을 증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이익을 당할 것 같고, 손해보는 것 같고, 미래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당신을 만나기위하여 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겠습니다!)
기도
오늘도 살아계시며 우리를 주목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전혀 무엇을 해보려해도 할 수 없는 소경같고, 마음껏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소경같아도, 하나님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앞못볼때 보게하시고, 우둔한 입술에 지혜주셔서 주님을 증언하게 하시고, 세상에서 마치 출교당한 자처럼 살아갈때에라도, 주님은 찾아오셔서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며, 주님의 영광안에 살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